고통을 대하는 가장 이상적인 자세

엔카르나시온 수도원 (스페인 아빌라)

고통은 누구나 벗어나고 싶어한다. 특히 원인도 없이 받는 고통이나 핍박은 더욱 그러할 것이다. 알고서 얻어 맞는 폭력도 아파 죽겠는데, 갑자기 당하는 폭력은 얼마나 황당하고 힘들까? 아픔에 더하여 억울함까지 덧붙여지니 말이다. 즉, 육체적 괴로움과 정신적 고통이 짬뽕되어 무한확장된다. 그리고 가학자에게 분노가 치성하여 ‘나’의 마음에는 아픔에 대한 분노와 적에 대한 분노로 다른 생각이 끼어들 틈이 없어진다. 타인이 나에게 주는 정신적 가학도 마찬기지,

그리스도교 신자의 관점에서 예수님의 수난은 우리의 죄를 사해 주기위해서 대신 희생당하셨다는 원대한 주입식 이해가 따르지만 합리적인 이성을 가진 ‘나’라는 인간으로서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하느님이 초딩도 아니고, 그런식으로 해석해서는 안된다.

불교에서는 용서라는 말이 통용되지 않는다. 모든 것은 의지와 말과 행동의 결과로 이어지는 것이며, 그 업(Karma)의 발현은 누구도 가로챌수 없다. 따라서 용서란 말은 자기 자신과의 화해이지 상대방을 향한 것이 아니다. 적이 나를 괴롭힐 때, 그가 받을 업(Karma)의 결과를 생각하며 연민의 마음을 일으키고, 과거의 빚을 갚을 기회를 준 것에 기뻐하며 감사의 마음을 일으킨다면 내가 행복해지는 것이다. 달라이 라마의 입보리행론 강의/이종복 옮김

그리스도교 수행자들이나 불교의 두타행자들이나 기승전-고행으로 삶을 끝마친데는 원대한 이유가 있었다.  그리스도교와 불교 수행의 접점, 고통(一切皆苦)

고양생화(枯楊生華)

몬세라트 수도원(스페인)

주역(周易)의 대과(大過)괘에 고양생화(枯楊生華)라는 표현이 있다. “마른 버드나무에서 꽃이 핀다”는 말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죽음으로써 영원히 살아있다. 그의 정신을 계승하는 팔로워들이 그가 죽은 뒤에도 끊이지 않고 이어지고 있다.

이미 1,000여년전 스페인의 깊은 산속에 이 수도원이 세워졌고 종교적인 이유에서이건 혹은 아름다운 절경 때문이건 전세계의 사람들이 몰려들고 있다. 나는 몬세라트 수도원의 검은 성모마리아보다 이 수도원 주위를 맴맴 돌면서 수도원 위에서 혹은 아래서 수도원을 바라보는 시간을 즐겼다. 수도원 전체의 절경을 바라볼 수 있는 산책 코스에서 고사목(왼쪽 사진)을 발견했다. 물론 완전히 죽어서 이 나무에 생명이 자라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죽음은 끝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 왜냐하면 우리는 매순간 죽고 살고 죽고 살고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노화라고 부르는 것은 세포의 재생과 죽음 중에서 세포의 죽음이 우세해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매순간 살고 죽고 살고 죽고 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세포의 죽음이 완전 우세해져서 재생이 멈추면 이것을 생물학적 죽음이라고 표현할뿐 그 다음에 다시 재생하지 못한다는 증거가 있는가?

몬세라트 수도원

하늘이 참 맑다.

하늘을 창천(蒼天)이라고 하지 않았는가? 이 뜻을 본떠서 역(易)에서는 이러한 표현이 있다.

生生之謂易

낳고 또 낳는 것을 역(변화)이라고 한다.

낳고 낳는 것을 창(蒼)이라고 표현한다. 곳집에서 푸른 풀이 무럭무럭 자라는 것을 의미하는 문자(초(艸) + 밥(食) + 땅(口) = 蒼)이다. 죽음의 변화는 죽음의 죽음일 터이고 그렇다면 태어남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그러니까 낳고 또 낳는 것을 변화(易)라고 표현하지 죽음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태어남이라고도 말하지 않는다.

다만 변화할 뿐이다.

거리의 생명

Carrer del Balc at manresa/spain

스페인의 바르셀로나 근교, 만레사에서 중세거리를 보존하고 있다는 전시관에 궁금해서 들렀다. 만레사의 정치인이 정책적으로 이 소도시에 관광객을 유치하려고 노력한다고 들었다. 물론 전시관의 이쁘장한 안내원의 친절한 영어설명을 이해한 것이니 대충 그렇게 알아들은 것이다. 만레사에 엄청난 화재가 있었다고 한다. 500여년된 거리가 온전하게 살아남은 이유는 지하에 형성되었기 때문이란다.

고대와 현재의 접점

그 이야기를 듣고 보니 만레사의 건물들은 새로지어진 건물들에 고대 건물의 흔적이 덧붙여져 있다. 반대로된 표현이 맞지만 나는 현대인이다. 그렇기 때문에 현재에서 바라본 과거의 흔적은 지금에 덧붙여진 무늬일 뿐이다. 도시 곳곳마다 건물 벽의 경계면에 구시대와 신시대의 흔적을 벽면을 통해서 살필수 있다.

전시관의 이 거리가 박제화된 것이 아쉽다. 화마(火魔)가 지나가고 남은 잿더미의 산에서는 생명이 재빠르게 일어나 다시 분주해진다. 그리고 생기가 다시 넘쳐난다. 그러나 인간의 거리는 전통이란 이름으로 온전하게 보존된다. 그리고 소량의 삥을 뜯는다. 고고참 인간종자의 잔머리란! 자린고비 구두쇠는 현찰을 장농속에 콕 쟁여놓는다. 돈은 유통되야 하는데,

제노아의 거리(이태리)

항구도시 제노아(이태리)의 이 거리도 500여년이 지났다. 여기에 수많은 사람들이 걸어다니고 있다. 이 거리를 걷고 있는 500여년 전의 사람과 지금의 사람은 옷차림만 바뀌었을 뿐이다. 아무도 없는 빈공간의 거리와 왁자지껄 떠들고 너저분하기까지한 거리의 차이는 무엇일까?

거리의 생명

물욕심이 너무 과한건 아니었을까?

스페인 세고비아의 수로

수도교가 놓인 자리는 계곡이었기에 과달라마 산맥의 호수에서부터 16km정도 이동하여 끌어들이는 물길이 1% 경사를 유지하면서 자연스럽게 흐르도록 만들어져야 했다. 바람이 실어주는 세고비아의 특성

수도교의 거대함과 아름다움에 놀랐고 고대 사람들이 16km 떨어진 산맥의 호수에서 물을 끌어다 쓸 정도였다면 도대체 얼마나 많은 양의 물이 필요했을 것이며 그것을 수용할 정도의 도시 규모는 도대체 얼마나 되었을까? 물길이 자연스럽도록 만들었다면 그 문명은 지금의 문명보다 더 똑똑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그렇게 먼 거리에 저렇게 큰 수도교를 만들었다면 저기서 흐르는 물의 유속은 어떠했을까?

그곳에서 흐르던 물 소리가 듣고싶다.

인간의 잔머리는 끝이없다.

수도교의 꼭대기에 물길의 폭이 어떨지 궁금하여 올라갔다가 볼 방법이 없어 아름다운 야경만 보았다.

아무도 관심 갖지 않는 감옥의 흔적

스페인의 톨레도, 십자가 성요한이 ‘어둔 밤’을 집필했던 감옥

톨레도에 온 이유가 이곳을 찾기 위해서였다. 십자가 성요한이라는 16세기의 가톨릭 명상가의 감옥이다. 이분이 집필한 ‘어둔 밤’과 ‘가르멜의 산길’은 가톨릭 수도자들에게는 대표적인 영성 교과서이다. 성당에 부속된 이 감옥에서 ‘어둔 밤’이라는 시를 썼다고 한다. 톨레도라는 관광 명소에 성지순례하는 가톨릭 신자들 조차 이곳은 잘 찾지 않는 듯 하다. 다만, 이분이 남겨놓은 ‘어둔 밤’ 시 첫구절과 감옥의 창살을 땜방한 흔적만 남아있다. 영성에 무관심한 우리도 감옥에 갖혀있다. 돈과 명예가 꼬시면서 채워주는 그런데 언제나 헛헛한 달달한 환상을 쫒는 사회적 육신적 관계의 감옥,

이곳을 찾기위해 톨레도 외곽의 강변, 둘레길을 걸으면서 톨레도를 조망하는 여유로운 산책을 즐겼다. 어둔 밤 시(최민순 신부/역)를 그대로 남겨 놓는다.

1

어두캄캄 한 밤중에

사랑에 타 할딱이며

좋을시고 아슬아슬

알 이 없이 나왔노라

내 집은 다 고요해지고

2

변장한 몸, 어둠 속을

비밀 층대로 든든하이

좋을시고 행운이여

어둠 속을 꼭꼭 숨어

내 집은 다 고요해지고

3

상서로운 야밤중에

날 볼 이 없는 은밀한 속에

빛도 없이 길잡이 없이

나도 아무 것 못 보았노라

마음 속 타는 불빛 밖엔

4

한낮 빛보다 더 탄탄히

그 빛이 날 인도했어라

내 가장 아는 그분이

날 기다리시는 그 곳으로

누구도 보이지 않는 바루 그 곳으로

5

오! 밤이여, 길잡이여

새벽도곤 한결 좋은 오! 밤이여

굄 하는 이와 굄 받는 이를

– 괴는 이로 몸 바꿔진 괴이는 몸을-

한데 아우른 아하! 밤이여

6

꽃스런 내 가슴 다만지

그분 위해 지켜온 그 안에

거기 내 님이 잠자실 때

나는 그를 고여 드리고

잦나무도 부채런 듯 바람을 일고

7

성머리에서 불어오는 바람

난 그 머리채를 흩어 드리고

님은 은근한 손으로

자리게 내 목을 껴주시니

일체 나의 감각은 아련히 갈앉았어라

8

하릴 없이 나를 잊고

님께로 얼굴을 기대이니

온갖 것 멎고 나도 몰라라

백합화 떨기진 속에

내 시름 던져 잊어두고,

푸른 하늘(靑天)과 맑은 마음(淸心)

독일 뤼데샤임의 맑은 하늘

유럽 여행 중에 가장 부러웠던 것이 어딜가나 맑은 하늘이었다. 요즈음 한국은 황사때문에 맑은 날을 보기가 참 드물어졌다. 이날 날씨가 무척 더웠다. 포도밭이 펼쳐져 있는 고지대의 수도원에서 햇빛을 가리는 구름이 고마웠다. 이때다싶어 하늘을 쳐다보면서 한컷 찍었다. 빛을 가리는 구름을 보면 밑바닥이 회색빛이다. 우리의 마음도 간혹? 이렇게 흐릴터인데 뽀송뽀송한 맑은 구름과 약간의 잿빛 구름이 어울리는 것을 보면 마음이 너무 맑아서도 안될 것 같다. 누가 그렇지 않았던가?

맑은 물에는 고기가 살지 않는다

인천시 부평구 십정동의 푸른하늘

장마철에 쾌청한 맑은 하늘을 보니까 기뻐해야할지 슬퍼해야할지 모르겠다.

막혀버린 문

이태리의 아시시에서, 죽음의 문이라고 불린다.

아시시 예찬에서

아시시 거리를 걸을 때 주의를 불러일으키는 것들 가운데 하나는 벽들에서 발견되는 돌들로 막혀있는 옛 문들이다. 그것들은 ‘죽음의 문’이라고 부르는 것들이다.

이에 대한 해석이 두 가지가 있다. 12,13세기에는 소규모 수공업자들이 아래층과 윗층, 가게나 작업장에서 살림집으로 자주 드나드는 용도의 문이었는데 평온한 시대가 되면서 폐쇄되거나 창문으로 변경되었다고 한다. 또는 이 문은 죽은 자의 시신이 나가는 문으로 당시까지 민간에 널리 퍼진 미신은 산 자와 죽은 자가 같은 문으로 드나들 수 없다고 생각하여 죽음의 문을 따로 내었다고 한다. 이 문은 평소에 잠겨있었다고 한다. 용도가 없으니 돌로 땜질을 하였을 것이다.

문 (門)은 외부와 내부를 연결하는 소통의 통로이다. 그러나 경우에 따라서는 소통도 줄여야한다. 지금 우리 사회는 너무나 과(過) 소통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애써 명상을 하기도 한다. 모두 다섯가지 감각에 의해서 일어나는 나의 느낌 때문에 몹쓸 감정이 일어나곤 하기 때문이다.

단순한 삶은 감각의 작용을 쉬는데 있다.

비난 받을지도 모르는 현실적 생각

대인관계에 있어서 우리는 보고도 못본 척 들어도 못들은 척 하는 경우가 있다. 생명이 위태한 경우가 아니라면 경우에 따라서는 불의도 잘 참아야 한다. 내가 나서지 않더라도 누군가 대신 나서주기도 하기 때문이다. 곪아진 것이 터질 때까지 시간이 걸리지만 말이다. 비겁하다고 욕하지 말것! 불의가 세상에 판을 치는데 내가 나서서 해결된다는 확실한 보장이 있으면 나서도 괜찮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기에는 나의 능력이 딸리고 너무나 복잡한 세상이 되어버렸다. 내가 나서서 된다는 생각 자체가 오만일지도, 특히 불의라고 큰소리 치고 나서는 사람은 대부분 말뿐인 정치가인 거와 같다. 불의를 잘 참는 것은 쉽다. ‘나’를 소중히 여기기 때문이다. 혹시나 ‘나’에게 가중될 불이익을 최소화하기 위한 소심한 행동일 수 있다. 물론 불의에 저항하는 것은 어렵다. 그러나 그 속에는 단순한 분노가 아닌 적의가 덧붙여진다. 이보다 더 어려운 것은 불의를 행하는 사람에게 적의를 품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보다 더 더 더 어려운 것은 그에게 자비심을 내는 것이다. 간디가 외친 비폭력 무저항이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이러기 위해서는 우선 감각의 작용을 쉬는 연습이 필요하다. 닫혀진 문을 보니 이런 생각이 들었다.

눈치보는 담쟁이와 눈치 안보는 담쟁이

스페인의 톨레도에서 만난 담쟁이(좌측)와 이태리의 피렌체에서 만난 담쟁이(우측)

담쟁이 덩굴이 건물벽에 붙어 올라가는 것을 보면 무정한 표면에 생명의 옷을 입혀주는 느낌이다. 좌측은 톨레도 동쪽 Alcantara Bridge를 바라보는 입구의 출입문을 위에서부터 빼곰하게 눈치보면서 누가오나 살금살금 내려오는 담쟁이다. 우측 이태리의 피렌체 거리를 걷다가 아래서부터 차곡차곡 열을 맞추어 기어 올라가고 있는 담쟁이의 마음을 살펴보았다. 창문틀에는 감히 접근을 하지 못하고 있다. 안에서 여기는 넘보지 말라고 엄포를 놓아서인가? 아쉬운가 보다. 슬그머니 가생이서부터 호시탐탐 눈치보고 있다. 천장까지는 아직 시간이 걸릴것도 같다. 그런데, 창문 안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궁금하다. 똑똑똑!

거시기 모하시는 거죠?

독일의 뤼데샤임에서 길을 걷다가,
안에 살고있는 주인장이 너그러운가 보다. 아니면 게으른?

독일의 뤼데샤임 숙소 근처에서 만난 담쟁이 덩굴이다. 이들은 눈치 안보고 마구 침범하고 있다. 까칠한 담쟁이와 마음 좋은 건물주, 아니면 게으른?

눈치를 보거나 말거나 담쟁이가 도시 전체 건물 벽에 쫙 깔렸으면 좋겠다. 특히, 새하얀 병원 벽에 담쟁이로 도배가 되면 그 병원의 외관은 좋지 않을까?

그러나, 겨울에는 휑~할것 같긴하다.

치유의 메타포, 빛과 어머니

톨레도 대성당의 El Transparent

톨레도 대성당에 들어가면, 중세 사람들이 실현해 놓은 이 지구상의 거대한 천국에 기가 질려버린다. 그러나 유럽 여행이 계속되면서 이곳저곳 다니다 보니 도시마다 있는 대성당이 거기서 거기인거 같다. 어찌보면 톨레도 대성당은 양반인 것도 같다. 예수는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고,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라고 했는데 유럽에 꾸며진 대성당은 마음이 가난한 거하고는 거리가 한참 먼거 같다. 그래도, 아름답다는 것은 인정해야겠다. 화려하다. 불과 같이 활활 타오르는 아름다움이랄까?

엘 트렌스파렌트(El Transparent)는 자연의 빛을 받아 투명하다는 의미라고 한다. 그 밑에 자리잡은 하얀 성모마리아, 빛과 어머니는 치유의 메타포이다. 어두움(병의 메타포)은 빛을 만나면서 순식간에 사라져버린다. 정신적 스트레스로 쉬고 싶을 때 생각나는 따스한 엄마의 품,

빛과 어머니의 조화만해도 아름다운데 여기에 화려함을 덧붙였다. 소박한 것을 좋아하는 나의 정서에 군더더기의 아름다움이라고 표현하고 싶다.

산마르틴 다리(Puente San Martín) 위에서

Puente San Martín

스페인의 톨레도에 방문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당일치기로 여행하고 떠나간다. 마드리드에서 가까운 거리에 있기 때문이다. 후다닥 사진찍고 휘리릭 사라진다. 여행에서 남는 행동(餘行)은 왔다갔다는 초고속 징표이기 때문이다. 물론 개인의 취향이다. 나는 3일을 묵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여유가 있었다. 소도시의 매력은 전체를 무작정 어슬렁거리며 훑어도 충분하다는 것이다. 톨레도에는 동쪽(Alcantara Bridge)과 서쪽(Puente San Martín)에 다리가 있다. 톨레도를 끼고 도는 타구스 강을 건너야하기 때문이다. 강주변에 둘레길이 조성되어 있다. 톨레도 시내는 온통 돌로 다닥다닥 조성되어 있지만 둘레길은 강과 식생이 조화롭게 그리고 고지대의 고도시 톨레도를 바라보면서 천천히 걸어다닐수 있도록 낭만유랑이 가능하다.

다리 위에서 젊은 남녀가 찐하게 찌찌뽕한다. 젠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