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혀버린 문

이태리의 아시시에서, 죽음의 문이라고 불린다.

아시시 예찬에서

아시시 거리를 걸을 때 주의를 불러일으키는 것들 가운데 하나는 벽들에서 발견되는 돌들로 막혀있는 옛 문들이다. 그것들은 ‘죽음의 문’이라고 부르는 것들이다.

이에 대한 해석이 두 가지가 있다. 12,13세기에는 소규모 수공업자들이 아래층과 윗층, 가게나 작업장에서 살림집으로 자주 드나드는 용도의 문이었는데 평온한 시대가 되면서 폐쇄되거나 창문으로 변경되었다고 한다. 또는 이 문은 죽은 자의 시신이 나가는 문으로 당시까지 민간에 널리 퍼진 미신은 산 자와 죽은 자가 같은 문으로 드나들 수 없다고 생각하여 죽음의 문을 따로 내었다고 한다. 이 문은 평소에 잠겨있었다고 한다. 용도가 없으니 돌로 땜질을 하였을 것이다.

문 (門)은 외부와 내부를 연결하는 소통의 통로이다. 그러나 경우에 따라서는 소통도 줄여야한다. 지금 우리 사회는 너무나 과(過) 소통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애써 명상을 하기도 한다. 모두 다섯가지 감각에 의해서 일어나는 나의 느낌 때문에 몹쓸 감정이 일어나곤 하기 때문이다.

단순한 삶은 감각의 작용을 쉬는데 있다.

비난 받을지도 모르는 현실적 생각

대인관계에 있어서 우리는 보고도 못본 척 들어도 못들은 척 하는 경우가 있다. 생명이 위태한 경우가 아니라면 경우에 따라서는 불의도 잘 참아야 한다. 내가 나서지 않더라도 누군가 대신 나서주기도 하기 때문이다. 곪아진 것이 터질 때까지 시간이 걸리지만 말이다. 비겁하다고 욕하지 말것! 불의가 세상에 판을 치는데 내가 나서서 해결된다는 확실한 보장이 있으면 나서도 괜찮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기에는 나의 능력이 딸리고 너무나 복잡한 세상이 되어버렸다. 내가 나서서 된다는 생각 자체가 오만일지도, 특히 불의라고 큰소리 치고 나서는 사람은 대부분 말뿐인 정치가인 거와 같다. 불의를 잘 참는 것은 쉽다. ‘나’를 소중히 여기기 때문이다. 혹시나 ‘나’에게 가중될 불이익을 최소화하기 위한 소심한 행동일 수 있다. 물론 불의에 저항하는 것은 어렵다. 그러나 그 속에는 단순한 분노가 아닌 적의가 덧붙여진다. 이보다 더 어려운 것은 불의를 행하는 사람에게 적의를 품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보다 더 더 더 어려운 것은 그에게 자비심을 내는 것이다. 간디가 외친 비폭력 무저항이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이러기 위해서는 우선 감각의 작용을 쉬는 연습이 필요하다. 닫혀진 문을 보니 이런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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