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초의 시작, 진동을 무엇이라고 부를까? 바람의 인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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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톨레도의 어느 성당(Monasterio de San Juan de los Reyes)을 둘러보고 계단을 내려오다 발견한 장식물과 천장의 문양에 이런 생각이 일어났다.

높은음자리표(오른쪽)를 닮은 장식물이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만물은 수(數)로 표현된다고 한다. 그 수(數)로부터 구조물이 탄생되었다. 음악도 따지고보면 숫자놀음이다. 음(音)의 높낮이와 길이도 숫자로 표현되니 말이다. 그래서 온세상은 숫자로 표현되지 못하는 것이 없다. 그런데, 수학은 싫다. 무정(neutral, 無情)하기 때문이다. 드러나는 모든 것에 감흥이 생기는 것은 무정(neutral, 無情)함에 덧붙여지는 무언가이다. 그것을 아름다움이라고 표현하고싶다. 세상을 숫자로만 표현하려다보니 무정(neutral, 無情)해졌다. 음(音)과 수(數)와 구조(structure) 그리고 아름다움



15세기에 지어진 건물이니 그당시에는 높은음자리표(오른쪽)의 개념이 있었을 것이고 그것에 의미를 부여한 문양일 것이라 추측된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이 이 문양의 머리와 꼬리에 사람의 얼굴을 새겨 놓았다. 무슨 의미였을까?

한 처음에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는데 말씀 또한 하느님이셨다. 요한 복음 1장



말씀의 의미를 과학적 용어로 이해하자면 파장(진동)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하느님은 진동의 인격화된 사물일 것이고 하느님의 사물화는 말씀이라고 표현되는 진동에너지일 것이다. 이를 구태여 우주에 충만한 에너지라고 표현한다면, 그 이름은 문화에 따라서 여러가지로 표현되는 에테르(ether), 기(氣) 등 일지도,

과학적 사고로 보자면 세상만사 진동 아닌 것이 없다. 이것을 표현하기 위하여 수(數)라는 도구가 생겨났다. 지금을 계량적 세계관이 지배하는 시대라고 표현한다. 가치의 평가도 수(數)라는 것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물론 수비학(數秘學/numerology)이라고 하는 오래된 수(數) 철학적 전통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다만 수(數)의 용도가 협소해졌고 낭만도 함께 사라져버렸다. 1등이 되려면 점수가 높아야 한다. 부자가 되려면 돈의 액수가 많아야 한다. 그런데 이놈의 숫자 놀음으로 감정이 일어난다. 게다가 무정(無情)한 수(數)만으로 세상을 이해하자니 감정을 가진 존재로서 한참 아쉽고 무언가 허전하다.

이 진동에너지가 물질(다른 진동에너지 집적체)을 만나 메아리(증폭 혹은 상쇄)쳐 일어나는 것이 바람이 아닐까? 물리적으로 온도의 차이에 의해서 열이 발생하고 이를 이어받아 바람이 일어난다고 한다. 그런데 열도 마찬가지로 진동의 한 형태이다. 열에너지는 충돌에 의해서 발생하는 것이니까,

인문학적으로 바람을 변화라고 표현한다. 접점(만남)을 통해서 무언가 일어나니까 접점의 당사자들은 이전과는 모습이 다르다.

그런데 그 바람이라는 진동을 아는 지각이 있는 감성물질(정신과 물질의 복합체)은 이미 바람을 느끼고 있었으니 그 안에 이미 바람이 내재하고 있다는 이야기다. 그렇다면 바람은 정신(영혼)과 물질보다 먼저일 것이고 이들의 연결고리라고 볼수 있겠다. 그래서 한 처음에 말씀이 있었다고 표현했을까? 진동의 에너지가 물질을 만나 바람을 일으켰고 그 바람을 맞아들인 정신과 물질의 복합체는 감성을 일으킨다. 그렇다면 다음과 같은 결론, 처음부터 끝까지 바람의 춤사위,

진동에너지 = 수(數) + 감정 = 수(數) + 아름다움(예술) 혹은 추함 = 진동에너지와 진동에너지가 만나서 발생하는 생명현상 + 현상계의 모두 = 하느님(악마도 포함)의 말씀

말씀과 하느님은 선후가 없다. 높은음자리표에 새겨진 머리와 꼬리의 얼굴은 감정을 일으키는 새로운 진동의 메아리를 상징한 것이 아닐까? 우리는 어떻게든 타자와 관계의 교감으로 감정이 일어나니 말이다. 그리고 그 일어나는 모습(얼굴)은 머리와 꼬리가 다르다.

항상 똑같지 않으니 이를 변화(無常) 라고 표현한다. 진동으로 일어나는 새로운 진동은 처음의 진동과 끝의 진동이 항상 다르다. 기왕이면 우리는 삶속에서 아름다움의 변화를 낳고 또 낳아야 함이 필요할지도,

그러나 그대가 어떤 소리가 높고 어떤 소리가 낮은지 알았을 때, 또 음정들의 수와 본성 및 그것들의 한계와 비율을 알았을 때, 그런 것들로 구성된 체계 즉 조상들이 발견했고 우리에게 선법(harmonies)이라는 이름으로 전해진 그 체계를 알았을 때, 수적으로 측정된 리듬과 박동이라고 불릴 수 있는 신체의 움직임들 속에서 그것과 상응하는 상태를 알았을 때, 똑같은 원칙이 모든 하나와 다수에 적용되어야 한다고 말할 때, 그리고 내가 당신은 그 모든 것을 익혔다고 말할 때, 나의 친구여, 그대는 완벽하다네. 그리고 그대가 마찬가지로 그것에서 같은 것을 잡아냈을 때, 그대는 다른 어떤 주제도 이해한다는 말을 들을 수 있다네. 몸의 노래(동양의 몸과 서양의 몸): 필레보스/플라톤의 인용
 
오늘날에는 단지 은유적으로만 ‘변화의 바람’을 말한다. 그러나 고대의 의사들이 피부와 모공을 관찰하면서 기울인 주의는 한때는 바람의 논의가 시공에 대한 구체적 경험, 지역의 기후에 대한 육체적 느낌, 계절적 분위기, 변화하는 정서, 우연을 표현했다는 점을 상기시킨다. 개인의 숨은 우주적 숨과 조화를 이룰 수 있다. 그리고 대개 이 둘은 발을 맞춘다. 그러나 바람은 갑자기 방향을 틀어서 미지의 지역으로 향할 수도 있다. 이것이 바람에 관한 궁극적 진실이다.몸의 노래(동양의 몸과 서양의 몸)
 
무릇 땅이 기를 내뿜으니 그 이름을 풍이라고 한다. 풍이 일어나면 온갖 구멍이 사납게 울기 시작한다. 너는 저 윙윙 울리는 소리를 들어봤겠지. 높은 봉우리의 백 아름이나 되는 큰 나무 구멍은 코 같고 입 같고 귀 같고 옥로 같고 술잔 같고 절구 같고 깊은 웅덩이 같고 얕은 웅덩이 같은 갖가지 모양을 하고 있지. 콸콸 거칠게 물 흐르는 소리, 씽씽 화살 나는 소리, 나직이 나무라는 소리, 흐흑 들이키는 소리, 울부짖는 듯한 소리, 웅웅 깊은 데서 울려 나는 것 같은 소리, 새가 울 듯 가냘픈 소리, 앞의 바람이 휘휘 울리면 뒤의 바람이 윙윙 따른다. 산들바람에는 가볍게 응하고 거센 바람에는 크게 응해, 태풍이 멎으면 모든 구멍이 고요해진다. 기쁨과 노여움, 슬픔과 즐거움, 걱정과 한탄, 변덕과 고집, 아첨과 방자함, 개방과 꾸밈, 음악 소리가 텅 빈 대나무 피리 통속에서 나오고 습한 증기로 버섯이 돋아나듯이 갖가지 변화는 밤낮으로 앞에서 번갈아 나타나는데, 그게 어디서 생겨나는지를 알지 못한다. (……) 저것이 없으면 내가 없다. 그런데 내가 없으면 누가 저것을 경험하겠는가? 그것은 우리 가까이에 있지만, 우리는 무엇이 그것을 일으키는지 알지 못한다. 장자(莊子)/지북유(知北遊)


죽음과 바람(風)의 인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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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aceful Deities from the Mandala of Hundred Peaceful and Wrathful Deities

티베트 사자의 서에서 사람이 죽을 때, 지(地)→수(水)→화(火)→풍(風)→공(空)의 순서로 분해된다고 한다. 대승 불교에서는 이 4대 요소에 공(空)을 더하여 5대라 하고 우주 만물은 이들에서 벗어나지 않는다고 한다. 물론 여기에 7대라고 하여 견(見)대와 식(識)대를 추가하여 더 정밀하게 묘사하는 대승 경전도 있다.

쉽게 설명하자면, 지탱하는 요소(地)→뭉치는 요소(水)→열(火)의 요소→움직임(風)의 요소→바탕(空)의 요소로 생명의 존재가 거친 요소의 복합체에서 점점 미세한 물질과 정신의 요소로 분해되어 소멸하는 과정을 죽음이라고 표현한다. 사자(死者)는 이러한 죽음의 과정을 겪으면서 극심한 소멸/분해의 공포와 고통을 경험한다. 그 고통과 공포의 본질은 변화되는 상황을 받아들일 수 없는 집착에 바탕한다. 우리 생명은 무질서도의 증가(흩어지는 현상)에 반대되는 집착 덩어리이기 때문이다. 죽음의 과정에서 제일 처음 분해가 시작되는 지(地)의 요소는 유지, 지탱하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 태생적으로 집착의 에너지는 무질서에 반하는 질서의 에너지이다. 이 집착의 에너지가 분해되어 없어지니 얼마나 고통스럽고 무서울까? 그러나 애착의 에너지는 번뇌를 쌓는 부정적인 측면도 있지만, 생명 유지라는 관점에서는 긍정적이다. 그런데, 죽음의 과정을 직접 경험한다는 전제는 무언가 이것을 인식할 수 있는 주체(소멸하지 않고 바라보고 인식하는 무언가)가 있다는 것인데 서양에서는 이를 ‘영혼’이라고 부른다.

영혼은 숙련된 연주자이다. 연주하기 전에 영혼은 자신의 악기를 준비한다. 생명이 없는 오르간에서 연주자는 오르간으로 넣어지는 공기와 다른 존재이지만, 생명이 있는 오르간의 경우에는 오르간 연주자와 오르간을 울리는 공기는 하나이자 같은 것이다. 나는 그것으로 영혼은 공기나 숨과 똑같다고 말한다. -대니엘 던컨(Daniel Duncan/1686)



불교에서는 이 ‘영혼’이라는 존재도 분해하여 ‘바람(風大), 보는 것(見大), 인식하고 기억하는 것(識大), 바탕(空大)’으로 쪼개어 본다. 바람의 요소를 미세한 ‘에너지 몸’으로 해석하여 여기에는 무수한 생애의 흔적(봄, 기억, 바탕)이 복합적으로 존재하기 때문에 바람의 요소로 분해되는 시점을 중음신(中陰身/이전 삶과 다음 삶의 중간 단계)이라고 부른다. 즉, 물질도 정신도 아닌 이 에너지 체(subtle body)를 ‘바람’의 요소로 분해되는 단계로 설명한다. 그런데 이 중음신이 보신(報身: 깨달은 부처의 에너지 체/청정한 에너지)으로 변화될 수 있다면 그 사자(死者)는 다시 윤회(번뇌의 바다)의 굴레에 떨어지지 않는다고 한다. 그래서 살아있는 동안 죽음의 과정을 매일 매일 명상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티베트의 수행자들은 말한다. 즉, 바람의 요소로 분해되는 단계에서 보는 마음(見), 기억하는 마음(識)을 정화하여 최종적으로 맑고 깨끗한 바탕의 요소인 공성(空性)에 도달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이때의 공성(空性)은 앞에서 표현했던 7대의 요소들을 모두 포괄하는 근본 바탕이다. 중음신이 된 사자(死者)는 모두 이 과정을 거치지만 자신이 쌓아왔던 습관의 업력(카르마의 힘) 때문에 정화되지 못하고 다시 지나온 업의 족쇄에 묶여 재탄생(윤회)의 과정을 거친다고 한다. 따라서, 티베트 수행자들이 묘사하는 재탄생(윤회)의 과정은 바람의 요소로 분해되는 단계부터 아주 중요하고 이때 사자(死者)의 의식이 얼마나 공포와 고통에서 벗어나 깨어있는가가 중요하다고 한다.

우리가 중음도(中陰道)를 성취할 수 있기를,
환신(幻身)의 삼매를 성취하여 청명한 빛을 떠나
오직 죽음의 청명한 빛의 마음과
바람만인 것으로부터 일어나
우리가 영광으로 불타는 붓다의 상(相)과
아름다움을 성취한
환희신(歡喜身)에서 일어날 수 있기를,
달라이라마, 죽음을 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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