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리 여행 前記] 여행 전기를 마치며/ 베네딕토 영성을 찾아서

작년 12월(2018년)부터 올해(2019년) 8월까지 저의 블록체인 기반 스팀잇 블로그에 유럽 여행기의 테마로 연재했던 글을 모아서 올립니다. 여행의 주제는 서양 전통 수도원 탐방이었습니다. 여행을 떠나기 전 틈틈히 가고 싶은 곳을 조사하면서 제 생각을 정리하고 여행을 계획 하였습니다. 그래서 5월 8일부터 43일간 유럽여행에 다녀왔습니다. 원래 계획과는 다르게 스페인뿐만 아니라 독일과 이탈리아를 둘러보았습니다. 스팀잇은 여타 개인 블로그와 다르게 글이력을 주제별로 열람할 수가 없기 때문에 저의 지난 글들을 다시 재검토하고 필요한 부분은 수정 및 정리할 계획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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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nastero di San Bendetto

내일(2019년 5월 7일) 스페인으로 여행을 떠난다. 태어나서 죽음을 맞이하는 모든 인간의 숙명을 생각한다면 굳이 여행을 떠난다고 말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떠나가는 것이 여행이기 때문이다. 여행전기를 준비하면서 처음에는 스페인만을 고집했다. 회사를 그만두고 전통 자연철학에 관심을 두고 (의도와는 다르게?) 공부해 보자고 마음먹었던 것이 결국에는 ‘영성’이라는 주제로 수렴되었다. 그래서 앞일을 모르는가 보다. 10년전에 나는 지금의 나의 모습이 이렇게 되리라고 생각해본적이 없다. 신해철님의 노래 제목처럼 ‘50년 후의 내모습’은 어떨까?

본래 가톨릭 가정에서 태어났지만 30대가 된 이후로는 성당에 가지 않았다. 지금까지 동양의 영성 전통에 뜻을 두고 공부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나에게 있어서 가톨릭은 마음의 고향과 같다. 절에 가는 것보다는 오히려 성당에 있을 때가 마음이 더 편안하다. 아마도 어릴 때부터 보고 자랐던 것이 돌아가신 어머님께서 늘 기도하셨던 모습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꼬꼬마부터 대학 학창 시절까지 주일학교에서 시간을 보내왔고 신부님이 된 몇몇 친구들이 있어서일까?

영성 흔적을 쫓아서 선택한 곳이 16세기 스페인의 이냐시오 성인, 아빌라 성녀 데레사와 십자가 성요한 이었다. 이분들의 영적 서적과 관련된 수도원 역사 서적들을 읽으면서 서양 수도원 전통의 체계화에 정신적이고 실천적 디딤돌이 되는 분이 베네딕토 성인임을 알게 되었다. 물론 베네딕토 성인과 이분들과의 사이에도 유명한 분들이 많다. 그러나 베네딕토 성인에게 관심이 가는 이유는 『규칙서』 때문이다. 공동체 생활의 규범을 다룬 『규칙서』에는 그 글을 쓴 베네딕토 성인의 사회/시대적 숨어 있는 맥락적 배려가 많이 있다고 한다.

그래서 여행의 마지막에는 성인의 은둔 생활 동굴 수행터 위에 지어졌다고 하는 ‘수비아코 수도원’에 방문하려고 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로마에서 ‘예수회’의 이냐시오 발자취를 다시 밟고 돌아올 생각이다. 여행이 시작된 계기가 이냐시오였고 로마는 제도화된 가톨릭의 총본산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참 아이러니하다. 예수 그리스도는 로마인들에 의해 십자가에서 처참하게 사형당하셨다. 그런데 예수그리스도의 팔로워들이 지배당했던 그 나라 로마에서 영적 지배자로 군림하였으니 말이다. 그러나 예수그리스도의 삶은 군림과는 거리가 멀다. 첫째가 꼴찌되고 꼴찌가 첫째되는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인생사이다.

낮은 데로 임하소서

나는 개인적으로 ‘깨달음의 사회화’라는 표현을 좋아한다. ‘깨달음’이라는 것은 혼자만의 것이 아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자랑질’하는 껍데기가 되어서도 안된다. 모든 수행 전통의 깨달음 속에는 ‘겸손함’, ‘온유함’, ‘자비심’이 흘러 넘쳐나서 드러나게 프로그램되어있다.


수행하는 사람일수록 정신병자가 되는 경우가 많다. 베네딕토 성인이 살았던 그 당시에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 당시 무대뽀 수행자들은 ‘원죄’라는 이름의 강박적 옭아 메어짐으로 제도권 교회의 정치적 선동과 권위에 고정관념화된 경향이 많았다. 물론 시대만 다를 뿐 지금도 그런 거 같긴 하다. 수행자들에게는 ‘해탈’, ‘천국’ 이런 것일 테고, 자본주의시대의 일반인들에게는 ‘돈, 이성, 명예’ 이런 것들이겠지. 그 목적을 수행하는 이유가 도대체 무엇 때문일까?

죄와 고통에 대한 편협한 집착은 오히려 우울증을 유발하고, 삶의 중요한 에너지인 공격성을 억압하도록 조장한다. 억압된 공격성은 잠재적 공격성으로 표출된다. 그리스도교 역사를 통틀어 공격적 충동은 타종교인들과의 관계에서 자주 나타난다. 때로 심한 자기 공격은 영성의 특징이 되기도 했다. 인간 정신의 구조를 도외시한 채 자신에게 분노했다. 자신에게 잔인한 자는 무의식적으로 주위의 사물도 거칠게 다룬다. 사물과 피조물에 하느님이 현존하심을 느끼지 못한다. 베네딕토의 영성은 공격적 정서에서 자유롭다. 수도교부들은 인간의 신성을 믿었다. 인간에게서 죄를 먼저 보지 않고 신성을 보았다. 모든 인간은 하느님이 창조하셨으므로 선하다. 그리스도는 우리 모두 안에 계시다. (중략)
 
“모든 일에 있어 하느님께서 영광을 받으시도록”
 
(중략) 하느님께서 영광 받으시기 위해서는 어떤 태도로 일해야 하는가? 베네딕토는 제57장에서 세 가지 태도를 제시한다. 겸손, 순명, 탐욕에서의 자유, 겸손은 기술자artifex는 ‘예술가’를 뜻하기도 한다가 일 자체에만 전념하는 것을 의미한다. 수도승은 자신을 내세우거나 자기 기술의 가치를 증명하는 데 노동을 악용하면 안된다. 안셀름 그륀의 베네딕도 이야기

20세기 인도의 한 영성인은 다음과 같은 실천 철학이 있었다. 이쪽의 신과 저쪽의 신이 이름은 다르지만 뭔가 통하는 것이 많다. 무엇이 중한디? ‘나’라고 불리는 ‘피터’는 이름일뿐 이름이 ‘나’를 대신할 수 없지 않은가? ‘이름’에 현혹되어서는 안 된다. 그 사람의 본질은 ‘이름’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름’은 단지 ‘이르게 하는 것다가서게 함, 소통하게 함’일 뿐이다. ‘종교’도 마찬가지, 그래서 나는 ‘영성’이라고 퉁치기를 좋아한다.

간디와 물레

행위만이 본분이요. 그 열매는 아니니라. 행위의 열매를 동기로 삼지 말 것이며, 행위를 피하려고 하지도 말지어다. [바가바드기타 제2장 47]

그대들의 권리(right)는 일하는 것이지 그 열매를 기대하는 것이 아니다. 주인이 자기 노예에게 말한다. “맡은 일이나 하고 농장에서 열매를 따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여라. 너는 내가 주는 것만 받으면 된다.” 신(神)은 똑같은 방식으로 우리를 제한한다. 그는 우리에게, 원한다면 일할 수 있다고, 그러나 일삵은 일체 자기가 결정한다고 말한다. 우리의 임무는 그분께 기도드리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이 일을 가장 잘할 수 있는 길은 곡갱이로 땅을 파고 강의 쓰레기를 치우고 우리의 뜰을 깨끗이 청소하는 것이다. 평범한 사람들을 위해 간디가 해설한 바가바드기타


8세기경의 베네딕토 규칙서 필사본

베네딕토 생전의 시대상은 정치 · 사회적으로 지금보다 분명히 더 어려웠다. 이른바 민족대이동 시대였다. 새 민족들이 이탈리아를 덮쳤고 국토는 초토화되었다. 로마제국은 멸망했다. 고대문화는 새 민족을 도야할 힘이 없었다. 정신적 공백이 생겼다. 재정 상태는 절망적이었다. 사람들은 더이상 농사를 지을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래 봤자 새로운 파괴가 노도처럼 밀려와 수확을 작살내리라는 것을 항상 염두에 두고 살았다. 교회도 내부 분열을 겪었다. 아리우스 이단이 교회를 분열시키고 재일치의 기운을 박탈했다. 아리우스파와 가톨릭 교회의 분쟁뿐만이 아니었다. 가톨릭 교회도 친비잔틴 세력과 친로마 세력으로 분열되었다. 로마제국 멸망 당시의 교회는 올바른 방향을 제시하지 못했고 버팀목이 되어 주지도 못했다. 이처럼 갈 곳 잃고 분열된 세상에서 베네딕토 수도원을 세우고 수도승들을 위한 『규칙서』를 썼다. 『규칙서』에서는 시대의 암울함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베네딕토는 난세를 한탄하고 있지만은 않는다. 그는 자생력 있는 소공동체를 세웠다. 안셀름 그륀의 베네딕도 이야기


베네딕토 성인이 은둔 생활하던 수행터

욕구를 자르면 영성은 공격성을 띤다. 자신에 대한 공격성이 남에게는 엄격함으로 표출된다. 회의(懷疑)를 억압하는 사람은 믿음이 없거나 다른 믿음을 가진 사람, 다른 영성의 길을 가는 사람 모두와 싸운다. 자신의 억압된 그림자 세계로 내려갈 용기를 지닌 사람만 이러한 분열에서 자유롭고, 자신과 타인에게 자비로울 수 있다. 자신의 억압된 그림자 세계로 내려갈 용기를 지닌 사람만 이러한 분열에서 자유롭고, 자신과 타인에게 자비로울 수 있다. 그는 자신의 억압된 부분을 남에게 투사하지 않고 남과 더불어 내적 변화의 길을 간다.
 
초기 수도승생활에서 겸손이 낮춤과 ‘흙’의 뉘양스만 지닌 것은 아니다. 온유와도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그리스어로 ‘겸손하다’는 말은 타페이노스tapeinos지만, 프라이스 prays를 ‘겸손하다’로 번역하는 경우도 잦다. 프라이스는 본디 ‘자비, 온유’를 뜻한다. 에바그리우스 폰티쿠스에게 온유는 영적 아버지의 표상이다. 온유란 자타自他를 부드럽게 대함이며 자타의 흠결과 약점에 자비를 베푸는 것이다. 온유한 사람한테서는 겸손한 자아인식으로 마음 깊이 변화되었음이 느껴진다. 신약성경은 겸손을 하느님에 대한 태도로만 보지않고, 사람을 대하는 태도로도 이해한다. 그래서 겸손을 온유, 부드러움, 관용 등과 한데 묶어 생각한다. 안셀름 그륀의 베네딕도 이야기

기도prays가 ‘겸손하다’는 의미라는 것을 처음 알았다. 무언가를 갈구한다는 것은 어찌보면 정성스러움이 전제되야할 것이고 정성스러움이란 자만심과는 반대되는 성정일 것이다. 그리고 정성스럽게 만드는 것은 바로 겸손함일 것이기 때문이다.


ps. 아씨시의 프란치스코 성인의 수행터도 방문할 예정이다. 전기 없이 그대로 여행지에서 작성할 것이다.

[스페인 여행 前記] 돈키호테에게 보여진 풍차: 일수사견(一水四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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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키호테의 풍차마을 Castle of Consuegra

“운명은 바야흐로 우리가 예상했던 것보다 더 좋은 방향으로 우리를 인도하고 있다. 자, 산초여, 저쪽을 보아라. 서른 아니 그보다 훨씬 많은 흉악한 거인들이 버티고 서 있다. 나는 저놈들과 싸워 다 죽인 후에 거기서 얻은 전리품으로 일약 거부가 된단 말이다. 이것이야말로 정의의 전투, 이 지구상에 널려 있는 악의 씨를 근절시키는 것만이 하느님에 대한 위대한 봉사인 것이다.” 돈키호테 제8장

대상은 그대로 있지만 그 대상을 보는 마음은 보는 이에 따라서 항상 고정되어 있지 않다는 ‘일수사견(一水四見)주1’을 400여년전 개그로 희화했던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의 풍차마을이 궁금하였다. 관련된 내용을 인터넷에서 검색하다가 돈키호테를 통해서본 현실의 의미란 글을 읽었다. 라만차는 스페인 내륙에 위치해 있다고 한다. 사진에 일렬로 늘어선 풍차들이 고성(古城)을 향하고 있다. 고성(古城)을 괴물로부터 지키고자 고래고래 악지르면서 풍차에게 고성(高聲)을 지르면서 달려들었던 돈키호테의 마음을 상상해볼 수 있겠다. 나도 약간 똘기가 있기 때문일까?


주1: 일수사견(一水四見)은 같은 물이지만, 천계(天界)에 사는 신(神)은 보배로 장식된 땅으로 보고, 인간은 물로 보고, 아귀는 피고름으로 보고, 물고기는 보금자리로 본다는 뜻


세상에는 누구에게나 똑같이 파악되는 하나의 ‘객관적 세계’란 아예 존재하지 않고, 오직 각각의 생물체가 구성하는 무수히 다양한 가상세계들만이 존재한다는 것이지요. 윅스퀼은 이런 가상세계를 환경세계Umwelt라고 불렀답니다. 주목해야 할 것은 이렇게 만들어진 환경세계들 사이에는 어느 것이 ‘참’이거나 ‘거짓’이라고 판단할 기준이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각자의 인식은 그가 구성한 환경세계에 의한 해석일 뿐이지요. 이를테면 들녂에 만발한 꽃은 아름다운 장식을 만들려는 소녀의 환경세계에서는 하나의 장식품입니다. 하지만 꽃줄기를 이용하여 꽃 속에 있는 먹이들에게로 가려는 개미의 환경세계에서는 길이고, 꽃을 뜯어먹는 소의 환경세계에서는 먹이지요. 돈키호테를 통해서본 현실의 의미

틀리다는 것과 다르다는 것은 분명이 다른 의미일 것이다. 자신만이 옳고 당신은 틀리다가 아니고 내가 보는 견해와 다른 사람이 보는 견해가 다르다는 것이다. 타자의 생각하는 바를 인정해주자는 것이다. 여기에는 상호존중의 미덕이 밑바탕에 깔려있다.

그런데 의문이 생긴다. 견해가 다르기 때문에 그것을 인정해 주어야한다면 선이냐 악이냐의 가치판단의 기준은 무엇이 되어야할 것인가? 아니면 선과 악이라는 가치 자체가 의미가 없다는 것인가?

일수사견의 의미는 견해의 다양성이라는 것에서 끝나지 않는다. 즉, 아귀가 물을 볼때 피고름으로 보는 그 해석틀(frame)을 천계에 사는 신이 물을 보배로 장식된 땅으로 보는 해석틀로 전환시키도록 도와주어야 한다는 당위성도 필요한 것이다. 그리고 자신도 신의 해석틀로 전환하자는 것이다. 아귀는 분노와 갈증의 고통에 휩싸여 있기 때문에 그 고통을 덜어주어야 한다는 공감共感/Sympathy의 실천적 의지를 숨기고 있는 것이다. 타자와의 조화라는 원대한 목적을 위해 우선 필요한 것이 타자의 정신적 해석틀을 먼저 이해해주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이해란 동참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나쁜 짓도 동참해야 하는 것일까? 그런데 우리가 나쁜짓이라고 말하는 바로 그 나쁜 짓을 과연 칼로 무자르듯이 반듯하게 정의내릴수 있다는 것일까?

이것이 항상 문제이다. 내가 상대방의 견해를 바로잡기 위해 소통하는 행위는 자칫하면 또 하나의 폭력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돈키호테를 보라! 풍차는 공공재산아니면 다른 누군가의 소중한 재산일 것인데, 자신만의 세계관에 갇히어 단정하여 앞뒤 안가리고 달려가 그 기물을 파손해 버린 것이다. 물론 자기가 당했지만,

때론 ‘하느님의 이름으로’라는 선의?우리가 믿는 하느님의 이름이 선의인가?로 포장된 가식주2으로 행해졌던 종교박해 혹은 종교 전쟁, ‘국민을 위해’라는 선의국민을 위한다는 선의가 하나로 고정될수 있는가?로 포장되는 정치적/개인적 탐욕들을 가려내는 견해 또한 중요한데 말이다.


주2: 가식이라고 표현하기도 어렵다. 왜냐하면 가식이란 것은 자신의 행위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면서 숨기고 진실된 행동인 척하는 것이다. 그러나 일수사견은 가식이 아니라 그렇게 보이기 때문에 그것이 진실된 행위라고 생각할수 밖에 없다. 의식이 그렇게 프로그램화 되어 있는데 어떻게 그를 탓할 것인가?


그러한 행동을 하는 가치 판단의 기준을 무슨 근거로 세워야만 하는 것일까? 모든 사람에게 이롭도록 하는 공동선의 견해가 과연 있는 것인가? 불교에서는 견해라는 것을 삿된 견해와 바른 견해로 나눈다. 그렇다면 무엇이 삿된 견해이고 무엇이 바른 견해인가?

그다음은 견해에 대한 실천의 문제이다. 견해에 의하여 행동하기 때문이다. 첫단추가 잘못 꿰어지면 어긋나게 되어있다. 다음 단계의 실천이 조화로 귀결될 것인지 분열로 귀결될 것인지는 그 행위에 따른 결과로 판단되어질 일이다. 세상을 보는 해석틀에 대한 실천도 그만큼 다양하기 때문이고 누군가에게는 그 실천행위가 폭력으로 비추어지기도 할 것이다. 그리고 아니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행위의 결과는 미래의 것이기 때문에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른다. 결국은 나몰라라 해야할 것인가?

모든 견해는 그것대로 다 의미가 있기 때문에 인정해주자는 다원주의도 자칫하면 병폐가 될수 있다. 분열 혹은 부조화를 조장할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공자 할아버지의 중용(中庸)주3이 중요한 미덕인 거 같다. 그러나 공자 할아버지만 이말씀을 하셨을까? 중용은 곧 조화로운 삶인데 이것은 세계 어느 곳에서나 시대를 불문하고 발견되는 미덕일 것이다.


주3: 희노애락이 발현되지 않은 상태를 중(中)이라 하고 발현되어 절도에 맞는 것을 화(和)라고 한다. 중(中)이라는 것은 천하의 큰 근본이고 화(和)라는 것은 천하의 달통한 도이다. 중(中)과 화(和)를 다하면 하늘과 땅이 자리잡고 만물이 자라나게 된다. 중용


공동선의 실천이란 것은 단순해야할 것이다. 생명을 함부로 죽이거나 괴롭히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이것이 가능할 것인가? 당장에 먹고 살기 위해서 고기를 먹고 농사를 지으면서 잡초, 풀벌레를 살생하지 않는가?

어찌 보면 우리 인간의 모든 실천 행위의 총체인 삶의 여정은 덜 폭력적인 방법으로 향하는 대상 놀음일 것이다. 종교, 정치, 철학이라는 생각 놀음(견해)을 다 떼고 뭐가 남아야할 것일까?

생각해볼 문제이다.


한국 최초의 물레방아는 연암 박지원 선생님께서

여기 물레방아라 불리우는 그 무엇인가가 있다. 물레방아를 보고 떠오르는 나의 심상心象, 마음의 모습은 무엇인가? 나는 돈키호테처럼 불의를 응징하는 기사도에 입각한 정의의 사도가 못된다.

본능에 충실한 수컷,

떡방아 찍는 것을 보면서 가루지기, 용녀, 변강쇠… 조선시대 포르노

나의 물레방아를 바라보는 심상은 아래 글을 통해 정당화된다. Dilthey아저씨 고마와요.

Dilthey는 이를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내성(內省)이 아니라 오직 역사를 통해서만 우리는 자기 자신을 알게 된다.” 자각의 주체는 일반적으로 그 자신의 자각을 내성하면서 자기 자신을 알고 이해하게 된다고 상상하지만, 새롭고 형성된 정신geist 과학(계보학에서 언어학까지)은 이것이 전혀 사실이 아니라는 점을 매우 분명히 밝혔다. 그들은 주관성이 자각 속에서 나타나는 거의 모든 것이 주관성으로는 보이지 않는 방대한 상호 주관적 그물망의 소산이라는 사실에 완전히 무지하기 때문이다. 부분적으로는 역사의 산물이기도 한 이 그물망은 Dilthey의 언급이 지적하였듯이, 주관성과 의식이 작동할 수 있게 하는 거대한 문화적 배경이다. 그리고 주관성은 내성으로 시간을 헛되이 보내며 스스로를 알고 있다고 상상하면서 여전히 이 형성적 그물망에 무지한 채로 지복 속에 머물러 있다. 이처럼 주관성은 정교한 거짓과 자기-기만의 그물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다. 켄 윌버의 통합영성

히히,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견해나 대상을 보고 즉각적으로 떠오르는 심상이라는 것은 오래도록 내려온 문화적 습성(해석의 그물망, 상호 주관적 그물망의 소산)이 무의식 속에서 자리 잡아서 나를 블랙홀처럼 끌어당겨 그렇게 떠오르게 만든다는 것이다.

땟치! 정교한 거짓과 자기-기만의 상호 주관적 그물망이라는 문화!

그니까 내책임이 아니다. 흐힛! 거기다가 나는 수컷 본성적 이데아를 충실히 따라갈 뿐이다. 내가 물레방아를 보고 음탕한 생각이 떠오르듯이 돈키호테의 심상도 아마 그러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결론 내리는 것이 정당할 것인가? 연암 박지원께서는 풍차를 설계하면서 이런 생각을하셨을까? 조선시대의 유학자셨으니 나랑은 달랐을 것이여. 그당시의 상호 주관적 그물망의 소산은 남녀칠세부동석이었지 아마?

이 또한 생각해 볼 문제다.


스페인 마드리드 남부에 위치한 라만차 지방은 마드리드 아토차 역에서 기차로 2시간 정도 소요된다고 한다. 우선 찜해둔다. 그런데 소설 속 상황이 세계적 관광 명소로 탈바꿈 되었다는 것은 그 나라에겐 축복일 것이다. 우리나라에도 그런 곳이 하나 있긴 하다. 그러나 세계적이진 않다.

춘향이 고향, 남원의 광한루

재작년에 남원골에 갈 기회가 있었는데 좀 초라한 느낌이었지만 광한루는 인상적이었다. 여기에 가보면 연못의 잉어들이 볼만하다. 커도 이렇게 큰 잉어들이 때지어 있는 것은 머리털 나고 처음 보았다. 간혹 사람의 얼굴을 닮은 인면어도 눈에 띈다고 한다. 나는 보지 못했지만 토실 토실하게 건강한 잉어들을 보는 재미가 있다. 잉어의 수명이 80년 정도 되는 것도 있다고 한다.

광한루의 인면어

이것 또한 인간이 잉어를 바라보고 투영된 심상心象

일수사견(一水四見)

근데 나는 이 잉어가 미녀와 야수의 야수로 보임

[스페인 여행前記] 동굴이 왜 수행자들의 공부방이 되는가? 자발적 고립은 양날의 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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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냐시오 성인의 동굴 수행터/Manresa cave

동굴은 구멍이다. 구멍은 비어있다. 비어있기 때문에 무언가 생겨날 잠재성1이 있는 것이다. 여성이 아름다운 것은 생명을 배태시킬 입구가 있기 때문이다. 동양에서 강조하는 없을 무는 아무것도 없다는 의미가 아니다. 비어있는 공간은 우리가 오감으로 감지못할 뿐이지 무한한 가능성을 품고 있는 형태형성장morphic field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정신적이건 물질적이건 비어있을때 소통의 여지가 있는 것이지 채워져있다면 막혀서 소통이 불가능하다. 공명한다는 것은 비어있다는 전제가 있어야 가능하기 때문이다. 고대 수행자들은 이것을 직관적으로 알았고 체험했기 때문에 자발적 가난함을 실천했던 것이다. 그러나 비어있기 때문에 항상 채워지고자하는 내적 혹은 외적 동인動因으로 인하여 금새 막혀버리는 가능성도 존재한다. 아니 오히려 더 쉽게 막힐수 있다. 청소를 안하면 계속 지저분해지는 것과같다. 깨끗할수록 때타기 쉬운 법이다. 그래서 그게 엄청난 병이 될수 있다. 그것을 극복하는 것도 수행이다. 수행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그에 상응하는 번뇌마煩惱魔도 더욱 강해진다고 한다.


주1 구멍 혈의 아래의 숫자 八(8)은 발생을 상징한다. 3과 8은 역학에서 동방木에 비유하는데 생성, 창조, 발생의 의미를 갖는다.


몬세라트 산에서 내려온 이냐시오 성인은 수도원에서 15㎞ 떨어진 만레사 마을 인근 동굴 안에서 1년간 영신수련을 했다. 이 시기 그는 관상과 내적 쇄신을 통해 은총의 지배를 받는 속량된 몸으로 그리스도의 새로운 인간(로마 6장 참조)으로 태어났다. 하지만 그의 영신수련은 결코 순탄치 않았다. 회심의 순간을 단 한시라도 잊지 않기 위해 몬세라트 산봉우리가 바라다보이는 동굴에서 그는 연일 단식과 고행을 하며, 때때로 나무를 깎은 탁발 그릇을 들고 문전걸식으로 생명의 끈을 유지한 채 추위를 견디며 어둡고 습한 동굴 안에서 하느님과의 만남에 전념했다. 한때는 어두운 밤에 갇힌 자신의 영에서 벗어나지 못해 자살을 생각할 만큼 우울증에 빠지기도 했다. 그래서 그의 영신수련에는 기도방법뿐 아니라 삶의 태도를 근본적으로 바꾸려는 지력과 의지의 수련법도 어우러져 있다. [스페인 가톨릭 문화와 역사 탐방] (4-끝)로욜라·몬세라트·만레사

폐관閉關이란 수행용어가 있다. 그대로 직역하면 문을 닫아걸어 잠근다는 뜻인데 수도자들은 일정기간 동안 외부와의 소통을 단절하고 수행에만 열중한다. 그 이유는 감각의 문이라는 오관눈/코/입/귀/몸의 감각, 五官을 독하게 차단하는 것이다. 짧게는 100일 길게는 1,000일 수행2을 한다. 그러나 생명체의 본성은 활동성에 있기때문에 가두면 가둘수록 이것이 안에서 쌓이다가 급기야 반대로 방향을 틀어 뻗어나가는 압력이 증가하기 마련이다. 압력밥솥을 상상해보자. 강하게 막을수 있는 정신적/신체적 여력이 충분하지 않으면 폐관수행이 실패한다. 더큰 문제는 정신적/신체적 질병이 발생하는 것이다.


주2 전통 수도 신체학에서는 대개 30일 주기로 3번을 사이클로 가정할 때 신체나 정신의 1주기가 완성된다고 한다. 선방에서 100일 수행을 하는 이유가 인체를 이루는 지수화풍 사대의 생성과 소멸의 주기가 3개월(대략 100일)을 기준으로 마디를 이루고 3년(1,000일)을 기준으로 대순환이 되기 때문에 수행을 발심하여 이 기간동안 용맹정진을 한다면 공덕변화의 마디를 생성시킨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것을 생명에너지라고 해두자. 그것은 강력한 욕구가 될 수도 있고 분노가 될 수도 있다. 욕구나 분노의 힘은 엄청난 힘을 발휘한다. 일상생활의 에너지보다 분노와 탐욕의 몰입 강도가 훨신 크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러한 에너지들은 어디론가 빠져나가거나 길들여져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그 강력한 활동성의 욕구 에너지가 폭발되어 정신적 혹은 신체적 장애로 발현될 위험이 항상 도사리고 있다. 그렇기때문에 티베트에서는 폐관수련이 가능한 수도자를 스승이 엄밀하게 심사하여 결정한다고 한다.

그러나 세상과의 소통이 단절되면 그만큼 내적 자기성찰의 시간도 따라서 풍부해진다. 그 강력한 욕구에너지를 정신의 에너지로 쌓고 길들여 긍정적으로 순화시키는 것이 바로 폐관수행의 요체이다. 따라서 이 수행은 양날의 칼처럼 순기능과 역기능이 항상 공존하는 것이다. 겉으로 본다면 수행자와 죄수는 그들이 거주하는 장소와 형식면에서 자발성의 있고 없음의 차이뿐이다. 그러나 그 자발적 수행도 폐관이 극에 달하여 자신의 정신/생명 에너지가 쌓아지는 과정에서 제대로 갈무리되지 못한다면 울체가 되어 죄수의 행동처럼 변질되어 버린다.

Kundalini Awakening Symptoms

쿤달리니 수행증후군이 비슷한 예이다. 다양한 종류의 수행 전통들이 있지만 갈무리된 에너지들이 타자와의 적절한 소통으로 순화되지 않는 자발적 고립을 선택한 만큼 정신적 혹은 육체적 어려움을 크게 발생시킬 수 있다. 쉽지않은 길을 선택한 만큼 위험성도 비례하여 잠재한다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동굴 수행자들 중에 정신병자나 사회적 관계에서 악영향을 미치는 사람들이 많다.

내눈을 바라봐


본질적인 질문이 있다. 수행자들이 왜?
깨달음을 추구하는 것인가?

어느 스님에게서 들은 법문이 있다. 깨달음을 열반, 기독교적 용어로 천국이라고 표현할 수 있겠는데 쉽게 설명하자면 번뇌의 소멸기독교적 용어로 하느님과 항상 함께함이다. 거기?는 탐욕, 분노, 어리석음이 없는 정신적인 안식처이다. 번뇌의 잠재성도 없는 경지이다. 그런데 그렇게 번뇌를 완전히 소멸시킨다는 것이 왜? 필요한가?

모든 사람에게 이익이 되게함이다. 즉, 깨닫기위해서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이익이 되기위해서 수행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모든 사람의 번뇌 소멸(해탈)로 인도하기 위해 수행을 하는 것이라고 한다. 나만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을 천국으로 가게하기 위해서 수행을 한다는 것이다. 수행의 최종목적은 홀로서기가 아니라 함께서기이다. 모든 사람에게만 국한되어서도 안된다. 생명, 나를 둘러싼 우주까지도 여기에 포섭된다.

그래서 대승(大乘)

즉, 크나큰 수례라는 것이다. 해탈 혹은 천국으로 인도하는 짐꾼,

그런데 그러기 위해서 폐관수행처럼 자발적 고립을 선택한다는 역설이 있다.

소요산의 자재암

원효대사가 창건한 자재암은 원효대사가 요석공주의 세속의 인연을 맺은 뒤 이곳에 초막을 짓고 수행하고 있을 때, 관세음보살이 변신한 아름다운 여인이 유혹을 하였다. 설법으로 유혹을 물리친 원효대사는 이내 그 여인이 관세음보살이었음을 깨닫고 더욱 수행에 정진하는 한편, 관세음보살을 친견하고 자재무애의 수행을 쌓았다는 뜻에서 절을 짓고 이름을 자재암이라 했다고 한다. Naver 블로그에서

원효 스님께서도 동굴수행 과정에서 여러가지 환영을 경험하셨을 것이다. 소요산의 자재암에 재작년에 가보았다. 거기서 돌아가신 어머님을 생각하면서 절을 하였다. 이번에는 스페인 만레사 이냐시오 성인의 수행터에서 어머님을 위해 당신의 손때가 묻은 기도서와 묵주를 가지고 기도를 해야겠다.

[스페인 여행前記] Fabada Asturiana 스페인의 순대국?

Fabada Asturiana

스페인은 유럽의 과거를 보존하려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가끔 든다. 한때는 자연의 일부로 여겨질 만큼 일상 생활에서 흔히 볼 수 있었지만 다른 데서는 벌써 오래전에 사라진 소리들과 냄새들과 직업들. 물건을 사라고 구성지게 뽑아대는 사람의 목소리, 집들 사이로 울려 퍼지는 호객 소리, 손수레와 당나귀가 멘 광주리에 담긴 과일, 생선, 꽃, 이 세상을 더 풍요하면서도 더 가난하게 만든 사회 정의와 기술과 대기업 때문에 이제는 무용지물이 된 그 모든 것 산티아고 가는 길

세스 노터봄이 이 책을 출판했을 때가 1990년대 초반인 걸로 안다. 벌써 30년 가까이 되어가니 스페인의 세태도 분명히 변화되었을 것이다. 그가 시장바닥의 풍경을 묘사하면서 쓴 토막글을 메모해 두었다. 우리의 재래시장도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상황이 어찌 스페인만의 문제일까? 아마도 유럽의 모든 곳 아니 사람이 복잡하게 모여드는 이름하야 문명화된 곳은 이같은 변화의 바람을 피해갈수 없을 것이다. 사람도 늙어가는데 하물며 그속의 사람사는 공간이 변하지 않고서야 과연 문명이라고 표현할수 있을까? 단지 변해가는 속도의 차이만 있을 뿐, 그리고 과거를 회상하며 아쉬워하고 그리워할 뿐이다. 변화의 속도는 아마 구성원의 기질과도 연관될 것이다. 그것보다 스페인은 기독교와 이슬람의 동서양 문화 용광로melting pot라서 매력이 있는 것이 아닐까? 그런데 30년이 지나버린 이 시점에서 스페인의 재래시장에서 서민음식을 먹어보고 싶다. 그리고 낯선 땅의 시끌뻑적찌근한 분위기를 느껴보고 싶다. 서양은 서민들도 세련되고 고상하다는 그러한 환상을 무참히 깨고싶다. 그냥 사람사는 곳은 똑같다고,

스페인의 시장바닥에서 부담없이 먹을 수 있는 음식이 무얼까? 생각하다가 Fabada Asturiana를 먹었다는 세스 노터봄의 글귀를 보고 인터넷을 검색하였다. 먹어본 것도 같다. 통조림으로,

이제는 다국적 교류의 시대이니 웬만한 음식은 창고형 매장에서 쉽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아버지께서 해외 출장에서 돌아오실 때 이것과 비슷한 소세지가 들어간 콩 스튜 통조림을 자주 사오곤 하셨다. 순대가 아닌 소세지만 들어가 있을 뿐, 이 스페인의 순대국이 스페인의 아스투리아스 지방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스페인 지도/ 아스투리아스 영역

해안선은 단조롭고 평야는 좁으며, 남쪽은 메세타(Meseta)의 북쪽 한계인 칸타브리아(Cantcbrica) 산맥을 등지고, 서쪽은 산지를 사이에 두고 이베리아 반도의 북서쪽을 차지하는 갈리시아(Galicia) 지방과 접해 있다. 비스카야(Viscaya) 만에 면해 있기 때문에 기후는 편서풍의 영향을 받아 온난 다습한 해양성 기후를 나타내며, 연 강수량도 1,000mm 이상이다. 칸타브리아 산맥에서 흘러내리는 하천은 모두 짧고 깊은 협곡을 형성하고, 하류에 작은 선상지를 발달시킨 곳도 있다. 고산 지대에 있으며, 10월에서 5월까지 눈이 내린다. 겨울엔 주로 비와 화창한 날이 번갈아가며 있다. 위키백과

고산지대라 거기에 살았던 사람들은 아마도 기름기 있는 음식을 즐겨 먹었을 지도 모르겠다. 추웠을 테니까, 그래서 콩과 돼지의 느끼한 조합으로 스튜를 만들었던 것이 아닐까? 음양오행에서 콩과 돼지는 水의 속성을 간직하고 있다. 그래서 에너지 저장고의 역할을 한다. 온난다습한 해양성 기후라고 하지만 겨울철 저온의 습한 날씨라면 우중충한 기분과 함께 스산함을 느꼈을 것이다. 이럴 때는 적당한 기름기와 따뜻한 독주가 필요할 것 같다. 나는 아주 추울때 재래시장에서 따뜻한 순대국에 소주 한잔이 생각난다. 순대국은 아주 추울때 먹어야 제맛이다.

스페인의 서민들은 Fabada Asturiana에 와인을 곁들여 먹을 것인가? 순대국의 느끼함을 새우젓, 들깨, 시뻘건 다대기로 메꾸어주는 조합을 그들은 어떤 식으로 해결했을지 궁금하다. 어찌 보면 그들에게 느끼함이란 생소한 느낌일지도 모르겠다.

내가 맛본 통조림 요리에서는 스튜에 녹아들어 있는 신맛이 돼지와 콩의 느끼함을 상쇄해주는 역할을 해주었던거 같다. 신맛은 木에 해당되어 水生木으로 강한 水의 기운을 흡수발산 시키는 역할을 해준다. 매운 성분이 첨가되는 경우는 목의 발생력을 극대화 시켜 뿜어주는 것이다. 그래서 나무에 꽃이 피는 것(木生火)을 火의 작용이라고 하는데 일반적으로 맵다는 것을 金에 비유하기도 하지만 작용의 측면에서 火로 보기도 한다. 매운 음식을 먹으면 몸속이 퍼지는 느낌이 들고 땀을 흘리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그리고 술의 속성도 火로 본다.

내가 즐겨 먹는 할매순대국

엉뚱한 상상을 한다. 산티아고로 가는 구도자들은 살면서 단 한번 만이라도 성 야고보 성인이 뭍혀있는 그곳에 함께있기 위해서 아스투리아스 지방까지 다다랐을 것이다. 이제 목적지가 멀지 않았다. 그러나 춥고 배가 고프다. 더 나아갈 기력도 없다. 영적인 갈구함을 지속시킬 정신적 동인도 육체적 무너짐과 환경적 혹독함을 극복하기에는 한계가 있다. 스무고개의 19고개에서 최극의 시련이 다가왔다.

재래 시장의 마음좋은 아즈매는 그 구도자에게 따뜻한 Fabada Asturiana를 말아주지 않았을까? 와인과 함께,

그러다가 눌러앉았다는…
(이건 아니다. 그러나 수컷 총각적 본성에 충실한 나는 아즈매가 아름답게 보여서 그만…)

스페인을 가로 지르는 약 800km의 순례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