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랏빛 향기/ 라벤다의 약성 인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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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시(이태리)의 라벤다 향기 요법 전문샵

라벤다의 대표적인 효능은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고 신경을 안정시켜 주는 것이다. 그밖에도 혈액순환, 진통작용(특히 두통, 벌레 물려 가려운 경우)에 효과적이다. 방문했던 수도원 약국에서 라벤다 에센셜 오일과 크림이 눈에 띄여 주저없이 구매 하였다. 그런데, 아주 더운 날 아시시 거리를 지쳐서 거닐고 있는데 보라색 꽃의 진열과 자전거가 눈에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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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측 사진의 샵은 꽃가게인 것 같은데 라벤다 관련 가공품도 판매하는 것 같다. 다양한 허브 제품을 판매하는 것이 아니라 라벤다 하나만을 취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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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의 수도원 약국과 아시시에서 구매한 라벤다 제품과 Culpeper’s color herbal

나는 자스민 향과 라벤다향을 아주 좋아한다. 이번에 구매한 라벤다 에센셜 오일을 자기 전에 정수리(백회혈), 관자놀이, 인당, 그리고 지금과 같은 여름철 모기 물려 가려운 곳에 바르고, 세탁 후 옷장에 옷을 보관하거나, 외출할 때 라벤다 오일을 몇 방울 떨어뜨리니 은은한 냄새가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고 상쾌함을 유지시켜 준다. 가려운 염증에 발라주면 즉방이다. 가운데 십자가 모양의 조그만 포푸리는 프란치스코 성인이 서명을 할때 즐겨썼다는 타우 문양이다. 여기에 라벤다 씨앗을 넣어두었다. 냄새가 가셔지면 꼭꼭 눌러주라고 한다. 그러면 다시 향이 삼출되어 나온다고 한다. 보라색 차콜(다공성 돌이라고 한다)은 냄새가 달아날 때 에센셜 오일을 첨가해주면 영구적으로 쓸수 있다고 한다.

Nicholas Culpeper라는 17세기 영국의 의사 겸 약초학자가 있는데 그가 저술한 Complete herbal이라는 책이 있다. 그는 당시에 유명한 점성술사이기도 하였는데 약초들의 효능과 쓰임새뿐만 아니라 약초에 영향을 주는 별자리에 대하여 정리하였다. 별자리와 질병에 관한 논문을 썼는데 어떻게 해석하는지 궁금하다. 동양의 고전인 황제내경의 오운육기학(운기칠편)은 육십갑자와 기후, 질병, 농업의 상관 관계에 관하여 치밀하게 정리하고 있다. 오운육기학을 기초로 18세기 조선시대에 쓰여진 초창결(草窓訣)은 육십갑자와 그에 따른 병의 세태, 그리고 처방을 자세하게 서술하고 있다. 유럽의 고대 의학도 점성술적 적용이 보편적이었던 것 같다. 오운육기학을 기초로 기후 예측도 가능하다. 믿거나 말거나지만 어느 정도 개연성이 있다.

점성학이란 행성의 자극에 대한 인간의 반응을 연구하는 분야이다. 별들이 의식적으로 호의나 적의를 품지는 않을 것이다. 별들은 다만 긍정적이거나 부정적인 일정한 빛을 발할 뿐이다. 그것들 자체로는 인간에게 해롭거나 이롭지 않지만, 인간이 각자 전생에서부터 작용시킨 인과율의 외부 작용에 일정한 통로를 제공해준다. 요가난다, 영혼의 자서전

우주의 별들이 인간에게만 영향을 주는 것이 아니다. 약초 점성학이라고 표현할까? 초목은 인간만큼 복잡하지 않기때문에 별이 주는 에너지적 특성을 온전하게 보존한다. 말 안듣고 제멋대로 행동하는 생명 종자는 지구상에 인간뿐이다. 고대 인간은 별의 정수를 그대로 받아 표현되는 약초의 개성을 색,맛, 생김새와 생태를 통해 파악하여 의학에 이용하였다. 이러한 점성학적 원리가 몹시 궁금하다. 한자 문화권의 약초학 고전인 신농본초경도 유사한 원리를 바탕으로 약성을 묘사하고 있다. 다만 약초와 관련된 별자리에 대한 설명이 없어서 아쉬웠는데 Culpeper의 complete herbal이 부족한 지적 호기심을 채워주어서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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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증, 스트레스 완화에 쓰이는 약초들의 경우 보라색 계열이 많다. 정서 불안을 화(火)의 항진된 작용으로 해석하는데 서늘한 성질을 가진 약초가 이를 진정시키는 데 효과적이다. 그런데 그러한 약초의 경우 블루 혹은 보라색 계열이 많다.맛이 주는 인체의 효과를 고려하기 이전에 색감이 주는 효과가 약성으로 그대로 반영된다. 반대로 정력이 약하고 노쇠한 경우에는 오미자, 구기자, 복분자 등을 많이 추천하는데 이들은 적색 계열이다. 적색은 강한 생명 에너지를 상징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색채 치유의 원리는 색이 가지는 정신적 풍미를 치료에 응용하는 것이다. 먹어야만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정신적 심상을 이용하여 신체에 영향을 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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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YSTAL LIGHT CHAKRA THERAPY

수성은 태양과 가장 가까운 행성이다. 인도의 영성학에서 수성을 인체의 머리에 상관 시킨다. 학파에 따라서 수성을 목(Throat), 양미간(Third Eye), 정수리(Crown) 차크라에 배속 시키는데 일치된 견해는 없는 것 같다. 라벤다의 색상이 보라색인 것과 정수리가 태양에서 가장 가까우니까 수성을 정수리(Crown) 차크라에 연관시키거나 수성의 점성학적 성격(맥락)을 고려하여 목(Throat) 차크라에 상관시키기도 한다.

수성(mercury)은 언어, 의사 소통, 전술, 지성 및 오리엔테이션을 의미합니다. 논리적이고 분석적인 사고뿐만 아니라 상황을 판단하는 방식을 지원합니다. 의식과 잠재의식 사이의 중재자로서, 고대 그리스 신화에서 헤르메스(Hermes)로 알려졌고 신들의 사자로 나타나 보통 날개 달린 신발로 대표됩니다. 수성은 또한 여행자와 상인의 신으로 간주 되며 지하 세계로 가는 도중 영혼의 지도자 역할을 합니다. 인간과 신의 중개자인 수성은 하늘과 땅 사이의 중요한 임무를 수행합니다. 출처에서 편집

고대 인체의 사유체계에서 목은 머리(하늘)와 몸통(땅)을 잇는 중재자와 같다. 특히 목에는 감상샘이 있는데 체온(열)조절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스트레스로 정신이 불안정하면 조급해지고 그에 따라 신체의 대사작용도 이상이 생긴다. 이것은 하늘(정신 작용)과 땅(몸의 대사작용)의 속도 완급조절에 문제가 생긴 경우이다. 이런 측면에서 목(Throat) 차크라를 수성에 빗대어 표현한 것으로 이해된다.

그래서 수성의 정수를 받은 라벤다는 진정 작용을 하는 것이 아닐까? 수성의 자전 주기는 58.64일이고, 공전 주기는 87.97일 인데 지구의 자전 주기보다는 60배가량 느리고, 공전 주기보다는 4배 정도 빠르다. 이것은 행동을 민첩하게 하되 마음은 여유로워야 한다는 수성이 가르쳐주는 행동철학이 아닐까? 우리는 눈앞에서 벌어지는 상황에 일희일비하며 과거에 대한 미련과 미래에 대한 두려움으로 당장 해야할 일도 제대로 못한다. 이것은 수성의 자전과 공전 주기처럼 위기상황에서도 서두르지 않는 차갑고 냉철한 이성과 바로 지금 놓여진 현실에 충실하라는 가르침이 아닐까?

태초의 시작, 진동을 무엇이라고 부를까? 바람의 인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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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톨레도의 어느 성당(Monasterio de San Juan de los Reyes)을 둘러보고 계단을 내려오다 발견한 장식물과 천장의 문양에 이런 생각이 일어났다.

높은음자리표(오른쪽)를 닮은 장식물이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만물은 수(數)로 표현된다고 한다. 그 수(數)로부터 구조물이 탄생되었다. 음악도 따지고보면 숫자놀음이다. 음(音)의 높낮이와 길이도 숫자로 표현되니 말이다. 그래서 온세상은 숫자로 표현되지 못하는 것이 없다. 그런데, 수학은 싫다. 무정(neutral, 無情)하기 때문이다. 드러나는 모든 것에 감흥이 생기는 것은 무정(neutral, 無情)함에 덧붙여지는 무언가이다. 그것을 아름다움이라고 표현하고싶다. 세상을 숫자로만 표현하려다보니 무정(neutral, 無情)해졌다. 음(音)과 수(數)와 구조(structure) 그리고 아름다움



15세기에 지어진 건물이니 그당시에는 높은음자리표(오른쪽)의 개념이 있었을 것이고 그것에 의미를 부여한 문양일 것이라 추측된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이 이 문양의 머리와 꼬리에 사람의 얼굴을 새겨 놓았다. 무슨 의미였을까?

한 처음에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는데 말씀 또한 하느님이셨다. 요한 복음 1장



말씀의 의미를 과학적 용어로 이해하자면 파장(진동)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하느님은 진동의 인격화된 사물일 것이고 하느님의 사물화는 말씀이라고 표현되는 진동에너지일 것이다. 이를 구태여 우주에 충만한 에너지라고 표현한다면, 그 이름은 문화에 따라서 여러가지로 표현되는 에테르(ether), 기(氣) 등 일지도,

과학적 사고로 보자면 세상만사 진동 아닌 것이 없다. 이것을 표현하기 위하여 수(數)라는 도구가 생겨났다. 지금을 계량적 세계관이 지배하는 시대라고 표현한다. 가치의 평가도 수(數)라는 것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물론 수비학(數秘學/numerology)이라고 하는 오래된 수(數) 철학적 전통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다만 수(數)의 용도가 협소해졌고 낭만도 함께 사라져버렸다. 1등이 되려면 점수가 높아야 한다. 부자가 되려면 돈의 액수가 많아야 한다. 그런데 이놈의 숫자 놀음으로 감정이 일어난다. 게다가 무정(無情)한 수(數)만으로 세상을 이해하자니 감정을 가진 존재로서 한참 아쉽고 무언가 허전하다.

이 진동에너지가 물질(다른 진동에너지 집적체)을 만나 메아리(증폭 혹은 상쇄)쳐 일어나는 것이 바람이 아닐까? 물리적으로 온도의 차이에 의해서 열이 발생하고 이를 이어받아 바람이 일어난다고 한다. 그런데 열도 마찬가지로 진동의 한 형태이다. 열에너지는 충돌에 의해서 발생하는 것이니까,

인문학적으로 바람을 변화라고 표현한다. 접점(만남)을 통해서 무언가 일어나니까 접점의 당사자들은 이전과는 모습이 다르다.

그런데 그 바람이라는 진동을 아는 지각이 있는 감성물질(정신과 물질의 복합체)은 이미 바람을 느끼고 있었으니 그 안에 이미 바람이 내재하고 있다는 이야기다. 그렇다면 바람은 정신(영혼)과 물질보다 먼저일 것이고 이들의 연결고리라고 볼수 있겠다. 그래서 한 처음에 말씀이 있었다고 표현했을까? 진동의 에너지가 물질을 만나 바람을 일으켰고 그 바람을 맞아들인 정신과 물질의 복합체는 감성을 일으킨다. 그렇다면 다음과 같은 결론, 처음부터 끝까지 바람의 춤사위,

진동에너지 = 수(數) + 감정 = 수(數) + 아름다움(예술) 혹은 추함 = 진동에너지와 진동에너지가 만나서 발생하는 생명현상 + 현상계의 모두 = 하느님(악마도 포함)의 말씀

말씀과 하느님은 선후가 없다. 높은음자리표에 새겨진 머리와 꼬리의 얼굴은 감정을 일으키는 새로운 진동의 메아리를 상징한 것이 아닐까? 우리는 어떻게든 타자와 관계의 교감으로 감정이 일어나니 말이다. 그리고 그 일어나는 모습(얼굴)은 머리와 꼬리가 다르다.

항상 똑같지 않으니 이를 변화(無常) 라고 표현한다. 진동으로 일어나는 새로운 진동은 처음의 진동과 끝의 진동이 항상 다르다. 기왕이면 우리는 삶속에서 아름다움의 변화를 낳고 또 낳아야 함이 필요할지도,

그러나 그대가 어떤 소리가 높고 어떤 소리가 낮은지 알았을 때, 또 음정들의 수와 본성 및 그것들의 한계와 비율을 알았을 때, 그런 것들로 구성된 체계 즉 조상들이 발견했고 우리에게 선법(harmonies)이라는 이름으로 전해진 그 체계를 알았을 때, 수적으로 측정된 리듬과 박동이라고 불릴 수 있는 신체의 움직임들 속에서 그것과 상응하는 상태를 알았을 때, 똑같은 원칙이 모든 하나와 다수에 적용되어야 한다고 말할 때, 그리고 내가 당신은 그 모든 것을 익혔다고 말할 때, 나의 친구여, 그대는 완벽하다네. 그리고 그대가 마찬가지로 그것에서 같은 것을 잡아냈을 때, 그대는 다른 어떤 주제도 이해한다는 말을 들을 수 있다네. 몸의 노래(동양의 몸과 서양의 몸): 필레보스/플라톤의 인용
 
오늘날에는 단지 은유적으로만 ‘변화의 바람’을 말한다. 그러나 고대의 의사들이 피부와 모공을 관찰하면서 기울인 주의는 한때는 바람의 논의가 시공에 대한 구체적 경험, 지역의 기후에 대한 육체적 느낌, 계절적 분위기, 변화하는 정서, 우연을 표현했다는 점을 상기시킨다. 개인의 숨은 우주적 숨과 조화를 이룰 수 있다. 그리고 대개 이 둘은 발을 맞춘다. 그러나 바람은 갑자기 방향을 틀어서 미지의 지역으로 향할 수도 있다. 이것이 바람에 관한 궁극적 진실이다.몸의 노래(동양의 몸과 서양의 몸)
 
무릇 땅이 기를 내뿜으니 그 이름을 풍이라고 한다. 풍이 일어나면 온갖 구멍이 사납게 울기 시작한다. 너는 저 윙윙 울리는 소리를 들어봤겠지. 높은 봉우리의 백 아름이나 되는 큰 나무 구멍은 코 같고 입 같고 귀 같고 옥로 같고 술잔 같고 절구 같고 깊은 웅덩이 같고 얕은 웅덩이 같은 갖가지 모양을 하고 있지. 콸콸 거칠게 물 흐르는 소리, 씽씽 화살 나는 소리, 나직이 나무라는 소리, 흐흑 들이키는 소리, 울부짖는 듯한 소리, 웅웅 깊은 데서 울려 나는 것 같은 소리, 새가 울 듯 가냘픈 소리, 앞의 바람이 휘휘 울리면 뒤의 바람이 윙윙 따른다. 산들바람에는 가볍게 응하고 거센 바람에는 크게 응해, 태풍이 멎으면 모든 구멍이 고요해진다. 기쁨과 노여움, 슬픔과 즐거움, 걱정과 한탄, 변덕과 고집, 아첨과 방자함, 개방과 꾸밈, 음악 소리가 텅 빈 대나무 피리 통속에서 나오고 습한 증기로 버섯이 돋아나듯이 갖가지 변화는 밤낮으로 앞에서 번갈아 나타나는데, 그게 어디서 생겨나는지를 알지 못한다. (……) 저것이 없으면 내가 없다. 그런데 내가 없으면 누가 저것을 경험하겠는가? 그것은 우리 가까이에 있지만, 우리는 무엇이 그것을 일으키는지 알지 못한다. 장자(莊子)/지북유(知北遊)


죽음과 바람(風)의 인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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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aceful Deities from the Mandala of Hundred Peaceful and Wrathful Deities

티베트 사자의 서에서 사람이 죽을 때, 지(地)→수(水)→화(火)→풍(風)→공(空)의 순서로 분해된다고 한다. 대승 불교에서는 이 4대 요소에 공(空)을 더하여 5대라 하고 우주 만물은 이들에서 벗어나지 않는다고 한다. 물론 여기에 7대라고 하여 견(見)대와 식(識)대를 추가하여 더 정밀하게 묘사하는 대승 경전도 있다.

쉽게 설명하자면, 지탱하는 요소(地)→뭉치는 요소(水)→열(火)의 요소→움직임(風)의 요소→바탕(空)의 요소로 생명의 존재가 거친 요소의 복합체에서 점점 미세한 물질과 정신의 요소로 분해되어 소멸하는 과정을 죽음이라고 표현한다. 사자(死者)는 이러한 죽음의 과정을 겪으면서 극심한 소멸/분해의 공포와 고통을 경험한다. 그 고통과 공포의 본질은 변화되는 상황을 받아들일 수 없는 집착에 바탕한다. 우리 생명은 무질서도의 증가(흩어지는 현상)에 반대되는 집착 덩어리이기 때문이다. 죽음의 과정에서 제일 처음 분해가 시작되는 지(地)의 요소는 유지, 지탱하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 태생적으로 집착의 에너지는 무질서에 반하는 질서의 에너지이다. 이 집착의 에너지가 분해되어 없어지니 얼마나 고통스럽고 무서울까? 그러나 애착의 에너지는 번뇌를 쌓는 부정적인 측면도 있지만, 생명 유지라는 관점에서는 긍정적이다. 그런데, 죽음의 과정을 직접 경험한다는 전제는 무언가 이것을 인식할 수 있는 주체(소멸하지 않고 바라보고 인식하는 무언가)가 있다는 것인데 서양에서는 이를 ‘영혼’이라고 부른다.

영혼은 숙련된 연주자이다. 연주하기 전에 영혼은 자신의 악기를 준비한다. 생명이 없는 오르간에서 연주자는 오르간으로 넣어지는 공기와 다른 존재이지만, 생명이 있는 오르간의 경우에는 오르간 연주자와 오르간을 울리는 공기는 하나이자 같은 것이다. 나는 그것으로 영혼은 공기나 숨과 똑같다고 말한다. -대니엘 던컨(Daniel Duncan/1686)



불교에서는 이 ‘영혼’이라는 존재도 분해하여 ‘바람(風大), 보는 것(見大), 인식하고 기억하는 것(識大), 바탕(空大)’으로 쪼개어 본다. 바람의 요소를 미세한 ‘에너지 몸’으로 해석하여 여기에는 무수한 생애의 흔적(봄, 기억, 바탕)이 복합적으로 존재하기 때문에 바람의 요소로 분해되는 시점을 중음신(中陰身/이전 삶과 다음 삶의 중간 단계)이라고 부른다. 즉, 물질도 정신도 아닌 이 에너지 체(subtle body)를 ‘바람’의 요소로 분해되는 단계로 설명한다. 그런데 이 중음신이 보신(報身: 깨달은 부처의 에너지 체/청정한 에너지)으로 변화될 수 있다면 그 사자(死者)는 다시 윤회(번뇌의 바다)의 굴레에 떨어지지 않는다고 한다. 그래서 살아있는 동안 죽음의 과정을 매일 매일 명상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티베트의 수행자들은 말한다. 즉, 바람의 요소로 분해되는 단계에서 보는 마음(見), 기억하는 마음(識)을 정화하여 최종적으로 맑고 깨끗한 바탕의 요소인 공성(空性)에 도달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이때의 공성(空性)은 앞에서 표현했던 7대의 요소들을 모두 포괄하는 근본 바탕이다. 중음신이 된 사자(死者)는 모두 이 과정을 거치지만 자신이 쌓아왔던 습관의 업력(카르마의 힘) 때문에 정화되지 못하고 다시 지나온 업의 족쇄에 묶여 재탄생(윤회)의 과정을 거친다고 한다. 따라서, 티베트 수행자들이 묘사하는 재탄생(윤회)의 과정은 바람의 요소로 분해되는 단계부터 아주 중요하고 이때 사자(死者)의 의식이 얼마나 공포와 고통에서 벗어나 깨어있는가가 중요하다고 한다.

우리가 중음도(中陰道)를 성취할 수 있기를,
환신(幻身)의 삼매를 성취하여 청명한 빛을 떠나
오직 죽음의 청명한 빛의 마음과
바람만인 것으로부터 일어나
우리가 영광으로 불타는 붓다의 상(相)과
아름다움을 성취한
환희신(歡喜身)에서 일어날 수 있기를,
달라이라마, 죽음을 말하다

황금 장식의 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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톨레도 대성당의 El Transparent

불당에 가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이 금박의 불상이다. 성당도 마찬가지다. 빛이 퍼져나가는 것을 표상한 성체도 금빛 장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유럽의 대성당 제대에도 황금 치장이 많다. 동양이나 서양이나 거룩한 장소에 황금 치장을 하는 이유가 금이 귀하고 비싸니까 ‘저의 공경심은 이 정도라구요!’라는 협박적? 그리고 과시적 마음의 표현으로 막연하게 생각했다. 궁금해서 구글 검색을 통해서 이 원인이 무엇일까? 찾아보았다.

부처님께서 살아 계실 때 몸에서 ‘자마염부단금색(紫磨閻浮檀金色)이 빛났다’고 합니다. 이 색깔은 ‘불타는 불빛의 색깔’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부처님 몸은 황금색이 아니라 ‘불타는 불의 색깔’이라고 해야 합니다.
 
불은 녹슬지 않고 그늘이 없습니다. 또한 모든 것을 정화시키기도 합니다. 불의 색깔은 곧 영혼의 색깔이며 살아있는 색깔입니다. 결코 인습이나 타성에 젖지 않는 색깔입니다. 그래서 불상을 불타는 색깔을 뜻하는 황금빛으로 칠하는 것입니다.
 
황금은 부자의 상징이 아닌 영혼의 색깔입니다. 그런데 무지한 이들은 이런 이치를 모르고 불상의 금빛도 부의 상징으로만 보아 황금 모으기에 혈안이 돼 있습니다. 불상은 왜 황금빛인가요



황금빛 치장은 불을 형상화한 것이라고 한다. 위 짧은 토막글을 통해서 “아하! 그렇구나”하는 이해와 함께 불의 의미에 대하여 잠시 생각해 보았다.

그러나, 활활 타오르는 불을 그릴 때 우리에게 떠오른 습관적인 표상은 빨간색이다. 어릴 때 나도 이점이 궁금했다. 불의 색은 노란색이 아닌가? 그런데 왜 빨간색으로 표시하지?

무찌르자 공산당!
 
원숭이 똥구녕은 빨게, 빨가면 사과 사과는 맛있어



빨간색은 정열/욕정, 분노/폭력, 활발함, 조급함을 상징한다. 반면에 노란색에서 느껴지는 감상은 빨간색의 이러한 지나침을 완화해주는 은은한 따뜻함이라고 표현해야 할까? 이렇게 금빛과 적색으로 일어나는 느낌은 확연하게 차이난다. 푸줏간, 창녀촌의 거리가 조성하는 적색 불빛은 그것으로 인하여 정욕과 탐욕적 폭력의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제어되지 않는 야생마 같은 감정의 동요랄까?

수도자들의 명상이 깊어지고 깨달음을 이루면 몸에서 황금빛이 드러난다는 의미가 인간에게 내재하고 있는 강렬한 부정적 에너지를 조복시켜 더이상 일어나지 않게 됨을 표현한 것이 아닐까? 고립을 선택하여 수행을 계속하다 보면 성욕이 엄청나게 일어난다. 수행 이론에서는 그 성욕의 에너지를 차가운 이성(지혜의 의지)의 힘으로 살살 갈무리하여 순화시키다 보면 내부에서 에너지 덩어리가 감지된다고 한다. 도가 수련에서는 이것을 단화기(丹化氣)라 표현하는데, 이 에너지 덩어리가 단전(배꼽 부위)에서 자라나 서서히 등줄기를 타고 올라가 머리 부위(정수리)에서 다시 전면을 통해 제자리로 돌아오는 순환의 과정을 임독유통(任督流通) 혹은 소주천(小周天)이라고 정의한다. 이 과정에서 그동안 쌓이고 잠재되었던 번뇌의 에너지들이 이 빛의 덩어리들과 융합되고 소멸하는단계에서 수행자의 신체에 빛이 난다고 한다. 특히 그 단화기(丹化氣)가 목을 통과하여 정수리로 가서 머릿골이 열리게되면 입천장에서 감로의 물이 흐르고 이때 머리 위에 둥근 빛의 띠를 볼수 있다고 한다. 마치 무더운 날씨에 뭉게구름이 비로 변하여 뜨거운 대지를 적셔주는 ‘가뭄에 단비’와 같다. 무더운 날씨와 뭉게 구름은 우리 정신의 번뇌 열과 복잡함과 혼탁함으로 연결시킬 수 있다. 그러나 수행자도 대부분의 경우 정욕의 에너지에 탐욕이 끈덕지게 달라붙어 감정과 감각의 노예가 되어버리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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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주천 수행


엘 트렌스파렌트(El Transparent)는 자연의 빛을 받아 투명하다는 의미라고 한다. 천장의 구멍도 활활 타오르는 느낌이다. 자세히 살펴보면 구멍 위에 앉아있는 돌출된 머리들이 불타오르는 불꽃의 꼭지 역할을 한다. 이것들은 인간의 부정적 감정 에너지를 상징한 것인가? 그런데 이곳으로 들어오는 투명한 빛으로 인하여 융합되고 있다. 천장은 인간으로 치면 정수리에 해당한다. 번뇌의 에너지가 아직 녹아들어 있는 단화기(丹化氣)도 머리까지 차올랐다. 그 머리에 조그마한 머리의 군상들이 아름답고 둥그럽게 둘러싸고 있다. 그래서 예술가들은 미치광이들이 많았던 것일까? 그들의 정신 안에 정열과 광폭이 융합되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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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항상 잡생각으로 머리를 꼭꼭 채워놓고 살고 있다. 그러나 조형물의 중심부에 성체가 황금빛으로 빛난다. 그 중심부는 아마도 심장이 아닐까? 머릿속에서 일어난 감정에 의해 동요되는 마음의 진동은 심장으로 그대로 전이된다. 그 주위의 천사들은 어쩌면 인간의 복잡한 감정 에너지들이 아닐까? 그 에너지는 단번에 제거될 수도 없고 제거 되도 안된다. 다만 순화되고 길들여야 한다. 빨간색의 심상은 정열과 폭력의 양면의 아수라이니까,

정열이 있기에 삶이 있고 생명이 유지된다. 그러나 과하면 그것이 폭력의 에너지로 변화한다. 이러한 생명의 뾰족한 에너지를 둥근 에너지로 바꾸어가는 과정에서 최종에 도달하는 몸의 표현이 황금빛이 아닐까? 중앙에 자리잡은 황금빛의 성체는 우리 인간에 내재되어 있는 깨끗한 마음의 빛을 표상한 것같다. 우리는 항상 바름과 바르지 않음에 대해 번뇌하면서 살아가고 있으니까, 그리고 그것은 우리가 이미 무엇이 바름이고 무엇이 바르지 않음인지를 태생적으로 입력되어 지니고 살아가는 빛의 존재라는 숨겨진 뜻이니,

모르면 윤회, 알면 해탈,



엉뚱하게 재미있다. 훗날 깨달음을 이룬 아기 예수를 안고서, 성모마리아는 배꼽 밑, 인간의 원초적 본능과 탄생의 자리에 놓여있다. 백색의 성모마리아는 아마도 복잡한 정신 에너지를 순화하는 서양 예술가들이 만들어낸 치유 메타포일지도 모르겠다. 순백의 하얀 이미지는 바로 깨끗함을 상징하니까,

그러나 순백보다 투명한 것이 한 수 위다. 투명한 것에는 걸림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천장에서 빛이 내려오나 보다. 엘 트렌스파렌트(El Transparent)는 자연의 빛을 받아 투명하다는 의미라고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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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 보니 도가의 수행도와 묘하게 연결된다. 백색의 성모마리아와 아기 예수는 단전(丹田)에서 일어나는 단화기(丹化氣)의 낳고 또 낳아(生生) 돌돌말아 일어나는 정화되고 정화되야 하는 생명 에너지의 표상?

도가수련에서 강조하는 상단전(上丹田)은 머릿골/천장, 중단전(中丹田)은 성체(심장), 하단전(下丹田)은 아기 예수를 품은 백색의 성모마리아/배꼽 밑 음부로 연결되어 해석해보니 그럴듯 하다.


빛을 프리즘으로 통과시키면 빨주노초파남보의 7가지 무지개 색깔로 분리된다. 인간의 감정 에너지들도 하나씩 실타래를 풀듯이 분리하여 7가지의 색깔로 분리시켜 몸의 중앙에 배치 시킨 차크라의 개념도 이러한 원리이겠지. 인간의 존재는 빛으로부터 왔으니 빛으로 변화해야 한다는 철학적 고찰을 실증하려는 수도의 경험과학이 아닌가? 그러나 복잡하게 얽혀있는 빛을 분리해내는 것은 너무나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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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Chakras and Body Healt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