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낭영성 소개


배낭영성 글 피터, 도서출판 춘자

2019년 유럽의 수도원을 여행하면서 정리하였던 글들을 스팀잇 홈페이지에 모았습니다. 이것이 결실이 되어 여행기를 출판하였습니다. 유럽 여행기 카테고리에 있던 모든 글들은 비공개로 전화하였고 책의 목차와 관련된 스팀잇 글들을 링크시켜 두었습니다.

프롤로그

세상속으로 8 1

여행전기

21세기는 영성의 시대 12 2|3|4
절벽 위에 세워진 수행자들의 공동터전 18 5
사회와 소통하는 통로, 수도원 약국 24 6

여행기

01. Spain

톨레도 7|7-1

톨레도 위치에 대한 풍수지리학적 고찰 27 8
엘 트렌스파렌트와 황금 장식의 미학 34 9|9-1

세고비아 10
수도교를 따라 걷다 41
톨레도의 바람과 세고비아 바람 45

아빌라 11
데레사 성녀와 영혼의 성 49 11-1
7궁방과 정신, 몸, 그림, 방위 57 12
그리스도교와 불교 수행의 접점, 고통 62 13|14

만레사
500년된 수행자의 밥그릇 69 15
자발적 고립은 양날의 칼 76 16
돈이 모이는 그림 81 17

몬세라트
검은 성모상의 염화미소 85 18
천연 전시관 92 19
영성의 자궁에 심은 씨앗 96 20
십자가와 검은 성모상이 향하는 곳 100 21

02. Germany

뤼데스하임
포도는 태양인의 과일 109 22
힐데가르트 폰 빙엔의 정신을 찾아서 115 23
자비심의 색깔 122 24

03. Italy

제노바 25
인생은 그런거야 129
제노바의 수도원 약국 133

밀라노와 피렌체 26
새로운 동행, 새로운 여정 137 27
대성당 앞에서 142
지상의 천국 146 28

라베르나
위대한 영혼의 물화 153 29
수행을 위해서 꼭 은둔하며 살아가야 할까 163
서양 고대 의학과 수도원 약국 168 30|31

아시시 32
아시시 예찬 175
팔문에 대한 소고 184

수비아코 33|34
베네딕토 성인의 신성한 동굴 191
벽화에 대한 단상 197

로마
마음과 거울 203 35
천택리와 택뢰수 209 35-1
판테온 신전과 빛이 가는 길 212 36
날마다 새롭게 217

에필로그

길의 끝에서 222 37
참고문헌

보랏빛 향기/ 라벤다의 약성 인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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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시(이태리)의 라벤다 향기 요법 전문샵

라벤다의 대표적인 효능은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고 신경을 안정시켜 주는 것이다. 그밖에도 혈액순환, 진통작용(특히 두통, 벌레 물려 가려운 경우)에 효과적이다. 방문했던 수도원 약국에서 라벤다 에센셜 오일과 크림이 눈에 띄여 주저없이 구매 하였다. 그런데, 아주 더운 날 아시시 거리를 지쳐서 거닐고 있는데 보라색 꽃의 진열과 자전거가 눈에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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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측 사진의 샵은 꽃가게인 것 같은데 라벤다 관련 가공품도 판매하는 것 같다. 다양한 허브 제품을 판매하는 것이 아니라 라벤다 하나만을 취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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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의 수도원 약국과 아시시에서 구매한 라벤다 제품과 Culpeper’s color herbal

나는 자스민 향과 라벤다향을 아주 좋아한다. 이번에 구매한 라벤다 에센셜 오일을 자기 전에 정수리(백회혈), 관자놀이, 인당, 그리고 지금과 같은 여름철 모기 물려 가려운 곳에 바르고, 세탁 후 옷장에 옷을 보관하거나, 외출할 때 라벤다 오일을 몇 방울 떨어뜨리니 은은한 냄새가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고 상쾌함을 유지시켜 준다. 가려운 염증에 발라주면 즉방이다. 가운데 십자가 모양의 조그만 포푸리는 프란치스코 성인이 서명을 할때 즐겨썼다는 타우 문양이다. 여기에 라벤다 씨앗을 넣어두었다. 냄새가 가셔지면 꼭꼭 눌러주라고 한다. 그러면 다시 향이 삼출되어 나온다고 한다. 보라색 차콜(다공성 돌이라고 한다)은 냄새가 달아날 때 에센셜 오일을 첨가해주면 영구적으로 쓸수 있다고 한다.

Nicholas Culpeper라는 17세기 영국의 의사 겸 약초학자가 있는데 그가 저술한 Complete herbal이라는 책이 있다. 그는 당시에 유명한 점성술사이기도 하였는데 약초들의 효능과 쓰임새뿐만 아니라 약초에 영향을 주는 별자리에 대하여 정리하였다. 별자리와 질병에 관한 논문을 썼는데 어떻게 해석하는지 궁금하다. 동양의 고전인 황제내경의 오운육기학(운기칠편)은 육십갑자와 기후, 질병, 농업의 상관 관계에 관하여 치밀하게 정리하고 있다. 오운육기학을 기초로 18세기 조선시대에 쓰여진 초창결(草窓訣)은 육십갑자와 그에 따른 병의 세태, 그리고 처방을 자세하게 서술하고 있다. 유럽의 고대 의학도 점성술적 적용이 보편적이었던 것 같다. 오운육기학을 기초로 기후 예측도 가능하다. 믿거나 말거나지만 어느 정도 개연성이 있다.

점성학이란 행성의 자극에 대한 인간의 반응을 연구하는 분야이다. 별들이 의식적으로 호의나 적의를 품지는 않을 것이다. 별들은 다만 긍정적이거나 부정적인 일정한 빛을 발할 뿐이다. 그것들 자체로는 인간에게 해롭거나 이롭지 않지만, 인간이 각자 전생에서부터 작용시킨 인과율의 외부 작용에 일정한 통로를 제공해준다. 요가난다, 영혼의 자서전

우주의 별들이 인간에게만 영향을 주는 것이 아니다. 약초 점성학이라고 표현할까? 초목은 인간만큼 복잡하지 않기때문에 별이 주는 에너지적 특성을 온전하게 보존한다. 말 안듣고 제멋대로 행동하는 생명 종자는 지구상에 인간뿐이다. 고대 인간은 별의 정수를 그대로 받아 표현되는 약초의 개성을 색,맛, 생김새와 생태를 통해 파악하여 의학에 이용하였다. 이러한 점성학적 원리가 몹시 궁금하다. 한자 문화권의 약초학 고전인 신농본초경도 유사한 원리를 바탕으로 약성을 묘사하고 있다. 다만 약초와 관련된 별자리에 대한 설명이 없어서 아쉬웠는데 Culpeper의 complete herbal이 부족한 지적 호기심을 채워주어서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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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증, 스트레스 완화에 쓰이는 약초들의 경우 보라색 계열이 많다. 정서 불안을 화(火)의 항진된 작용으로 해석하는데 서늘한 성질을 가진 약초가 이를 진정시키는 데 효과적이다. 그런데 그러한 약초의 경우 블루 혹은 보라색 계열이 많다.맛이 주는 인체의 효과를 고려하기 이전에 색감이 주는 효과가 약성으로 그대로 반영된다. 반대로 정력이 약하고 노쇠한 경우에는 오미자, 구기자, 복분자 등을 많이 추천하는데 이들은 적색 계열이다. 적색은 강한 생명 에너지를 상징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색채 치유의 원리는 색이 가지는 정신적 풍미를 치료에 응용하는 것이다. 먹어야만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정신적 심상을 이용하여 신체에 영향을 주는 것이다.

sound mind, sound body by mental effect of col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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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YSTAL LIGHT CHAKRA THERAPY

수성은 태양과 가장 가까운 행성이다. 인도의 영성학에서 수성을 인체의 머리에 상관 시킨다. 학파에 따라서 수성을 목(Throat), 양미간(Third Eye), 정수리(Crown) 차크라에 배속 시키는데 일치된 견해는 없는 것 같다. 라벤다의 색상이 보라색인 것과 정수리가 태양에서 가장 가까우니까 수성을 정수리(Crown) 차크라에 연관시키거나 수성의 점성학적 성격(맥락)을 고려하여 목(Throat) 차크라에 상관시키기도 한다.

수성(mercury)은 언어, 의사 소통, 전술, 지성 및 오리엔테이션을 의미합니다. 논리적이고 분석적인 사고뿐만 아니라 상황을 판단하는 방식을 지원합니다. 의식과 잠재의식 사이의 중재자로서, 고대 그리스 신화에서 헤르메스(Hermes)로 알려졌고 신들의 사자로 나타나 보통 날개 달린 신발로 대표됩니다. 수성은 또한 여행자와 상인의 신으로 간주 되며 지하 세계로 가는 도중 영혼의 지도자 역할을 합니다. 인간과 신의 중개자인 수성은 하늘과 땅 사이의 중요한 임무를 수행합니다. 출처에서 편집

고대 인체의 사유체계에서 목은 머리(하늘)와 몸통(땅)을 잇는 중재자와 같다. 특히 목에는 감상샘이 있는데 체온(열)조절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스트레스로 정신이 불안정하면 조급해지고 그에 따라 신체의 대사작용도 이상이 생긴다. 이것은 하늘(정신 작용)과 땅(몸의 대사작용)의 속도 완급조절에 문제가 생긴 경우이다. 이런 측면에서 목(Throat) 차크라를 수성에 빗대어 표현한 것으로 이해된다.

그래서 수성의 정수를 받은 라벤다는 진정 작용을 하는 것이 아닐까? 수성의 자전 주기는 58.64일이고, 공전 주기는 87.97일 인데 지구의 자전 주기보다는 60배가량 느리고, 공전 주기보다는 4배 정도 빠르다. 이것은 행동을 민첩하게 하되 마음은 여유로워야 한다는 수성이 가르쳐주는 행동철학이 아닐까? 우리는 눈앞에서 벌어지는 상황에 일희일비하며 과거에 대한 미련과 미래에 대한 두려움으로 당장 해야할 일도 제대로 못한다. 이것은 수성의 자전과 공전 주기처럼 위기상황에서도 서두르지 않는 차갑고 냉철한 이성과 바로 지금 놓여진 현실에 충실하라는 가르침이 아닐까?

태초의 시작, 진동을 무엇이라고 부를까? 바람의 인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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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톨레도의 어느 성당(Monasterio de San Juan de los Reyes)을 둘러보고 계단을 내려오다 발견한 장식물과 천장의 문양에 이런 생각이 일어났다.

높은음자리표(오른쪽)를 닮은 장식물이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만물은 수(數)로 표현된다고 한다. 그 수(數)로부터 구조물이 탄생되었다. 음악도 따지고보면 숫자놀음이다. 음(音)의 높낮이와 길이도 숫자로 표현되니 말이다. 그래서 온세상은 숫자로 표현되지 못하는 것이 없다. 그런데, 수학은 싫다. 무정(neutral, 無情)하기 때문이다. 드러나는 모든 것에 감흥이 생기는 것은 무정(neutral, 無情)함에 덧붙여지는 무언가이다. 그것을 아름다움이라고 표현하고싶다. 세상을 숫자로만 표현하려다보니 무정(neutral, 無情)해졌다. 음(音)과 수(數)와 구조(structure) 그리고 아름다움



15세기에 지어진 건물이니 그당시에는 높은음자리표(오른쪽)의 개념이 있었을 것이고 그것에 의미를 부여한 문양일 것이라 추측된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이 이 문양의 머리와 꼬리에 사람의 얼굴을 새겨 놓았다. 무슨 의미였을까?

한 처음에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는데 말씀 또한 하느님이셨다. 요한 복음 1장



말씀의 의미를 과학적 용어로 이해하자면 파장(진동)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하느님은 진동의 인격화된 사물일 것이고 하느님의 사물화는 말씀이라고 표현되는 진동에너지일 것이다. 이를 구태여 우주에 충만한 에너지라고 표현한다면, 그 이름은 문화에 따라서 여러가지로 표현되는 에테르(ether), 기(氣) 등 일지도,

과학적 사고로 보자면 세상만사 진동 아닌 것이 없다. 이것을 표현하기 위하여 수(數)라는 도구가 생겨났다. 지금을 계량적 세계관이 지배하는 시대라고 표현한다. 가치의 평가도 수(數)라는 것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물론 수비학(數秘學/numerology)이라고 하는 오래된 수(數) 철학적 전통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다만 수(數)의 용도가 협소해졌고 낭만도 함께 사라져버렸다. 1등이 되려면 점수가 높아야 한다. 부자가 되려면 돈의 액수가 많아야 한다. 그런데 이놈의 숫자 놀음으로 감정이 일어난다. 게다가 무정(無情)한 수(數)만으로 세상을 이해하자니 감정을 가진 존재로서 한참 아쉽고 무언가 허전하다.

이 진동에너지가 물질(다른 진동에너지 집적체)을 만나 메아리(증폭 혹은 상쇄)쳐 일어나는 것이 바람이 아닐까? 물리적으로 온도의 차이에 의해서 열이 발생하고 이를 이어받아 바람이 일어난다고 한다. 그런데 열도 마찬가지로 진동의 한 형태이다. 열에너지는 충돌에 의해서 발생하는 것이니까,

인문학적으로 바람을 변화라고 표현한다. 접점(만남)을 통해서 무언가 일어나니까 접점의 당사자들은 이전과는 모습이 다르다.

그런데 그 바람이라는 진동을 아는 지각이 있는 감성물질(정신과 물질의 복합체)은 이미 바람을 느끼고 있었으니 그 안에 이미 바람이 내재하고 있다는 이야기다. 그렇다면 바람은 정신(영혼)과 물질보다 먼저일 것이고 이들의 연결고리라고 볼수 있겠다. 그래서 한 처음에 말씀이 있었다고 표현했을까? 진동의 에너지가 물질을 만나 바람을 일으켰고 그 바람을 맞아들인 정신과 물질의 복합체는 감성을 일으킨다. 그렇다면 다음과 같은 결론, 처음부터 끝까지 바람의 춤사위,

진동에너지 = 수(數) + 감정 = 수(數) + 아름다움(예술) 혹은 추함 = 진동에너지와 진동에너지가 만나서 발생하는 생명현상 + 현상계의 모두 = 하느님(악마도 포함)의 말씀

말씀과 하느님은 선후가 없다. 높은음자리표에 새겨진 머리와 꼬리의 얼굴은 감정을 일으키는 새로운 진동의 메아리를 상징한 것이 아닐까? 우리는 어떻게든 타자와 관계의 교감으로 감정이 일어나니 말이다. 그리고 그 일어나는 모습(얼굴)은 머리와 꼬리가 다르다.

항상 똑같지 않으니 이를 변화(無常) 라고 표현한다. 진동으로 일어나는 새로운 진동은 처음의 진동과 끝의 진동이 항상 다르다. 기왕이면 우리는 삶속에서 아름다움의 변화를 낳고 또 낳아야 함이 필요할지도,

그러나 그대가 어떤 소리가 높고 어떤 소리가 낮은지 알았을 때, 또 음정들의 수와 본성 및 그것들의 한계와 비율을 알았을 때, 그런 것들로 구성된 체계 즉 조상들이 발견했고 우리에게 선법(harmonies)이라는 이름으로 전해진 그 체계를 알았을 때, 수적으로 측정된 리듬과 박동이라고 불릴 수 있는 신체의 움직임들 속에서 그것과 상응하는 상태를 알았을 때, 똑같은 원칙이 모든 하나와 다수에 적용되어야 한다고 말할 때, 그리고 내가 당신은 그 모든 것을 익혔다고 말할 때, 나의 친구여, 그대는 완벽하다네. 그리고 그대가 마찬가지로 그것에서 같은 것을 잡아냈을 때, 그대는 다른 어떤 주제도 이해한다는 말을 들을 수 있다네. 몸의 노래(동양의 몸과 서양의 몸): 필레보스/플라톤의 인용
 
오늘날에는 단지 은유적으로만 ‘변화의 바람’을 말한다. 그러나 고대의 의사들이 피부와 모공을 관찰하면서 기울인 주의는 한때는 바람의 논의가 시공에 대한 구체적 경험, 지역의 기후에 대한 육체적 느낌, 계절적 분위기, 변화하는 정서, 우연을 표현했다는 점을 상기시킨다. 개인의 숨은 우주적 숨과 조화를 이룰 수 있다. 그리고 대개 이 둘은 발을 맞춘다. 그러나 바람은 갑자기 방향을 틀어서 미지의 지역으로 향할 수도 있다. 이것이 바람에 관한 궁극적 진실이다.몸의 노래(동양의 몸과 서양의 몸)
 
무릇 땅이 기를 내뿜으니 그 이름을 풍이라고 한다. 풍이 일어나면 온갖 구멍이 사납게 울기 시작한다. 너는 저 윙윙 울리는 소리를 들어봤겠지. 높은 봉우리의 백 아름이나 되는 큰 나무 구멍은 코 같고 입 같고 귀 같고 옥로 같고 술잔 같고 절구 같고 깊은 웅덩이 같고 얕은 웅덩이 같은 갖가지 모양을 하고 있지. 콸콸 거칠게 물 흐르는 소리, 씽씽 화살 나는 소리, 나직이 나무라는 소리, 흐흑 들이키는 소리, 울부짖는 듯한 소리, 웅웅 깊은 데서 울려 나는 것 같은 소리, 새가 울 듯 가냘픈 소리, 앞의 바람이 휘휘 울리면 뒤의 바람이 윙윙 따른다. 산들바람에는 가볍게 응하고 거센 바람에는 크게 응해, 태풍이 멎으면 모든 구멍이 고요해진다. 기쁨과 노여움, 슬픔과 즐거움, 걱정과 한탄, 변덕과 고집, 아첨과 방자함, 개방과 꾸밈, 음악 소리가 텅 빈 대나무 피리 통속에서 나오고 습한 증기로 버섯이 돋아나듯이 갖가지 변화는 밤낮으로 앞에서 번갈아 나타나는데, 그게 어디서 생겨나는지를 알지 못한다. (……) 저것이 없으면 내가 없다. 그런데 내가 없으면 누가 저것을 경험하겠는가? 그것은 우리 가까이에 있지만, 우리는 무엇이 그것을 일으키는지 알지 못한다. 장자(莊子)/지북유(知北遊)


죽음과 바람(風)의 인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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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aceful Deities from the Mandala of Hundred Peaceful and Wrathful Deities

티베트 사자의 서에서 사람이 죽을 때, 지(地)→수(水)→화(火)→풍(風)→공(空)의 순서로 분해된다고 한다. 대승 불교에서는 이 4대 요소에 공(空)을 더하여 5대라 하고 우주 만물은 이들에서 벗어나지 않는다고 한다. 물론 여기에 7대라고 하여 견(見)대와 식(識)대를 추가하여 더 정밀하게 묘사하는 대승 경전도 있다.

쉽게 설명하자면, 지탱하는 요소(地)→뭉치는 요소(水)→열(火)의 요소→움직임(風)의 요소→바탕(空)의 요소로 생명의 존재가 거친 요소의 복합체에서 점점 미세한 물질과 정신의 요소로 분해되어 소멸하는 과정을 죽음이라고 표현한다. 사자(死者)는 이러한 죽음의 과정을 겪으면서 극심한 소멸/분해의 공포와 고통을 경험한다. 그 고통과 공포의 본질은 변화되는 상황을 받아들일 수 없는 집착에 바탕한다. 우리 생명은 무질서도의 증가(흩어지는 현상)에 반대되는 집착 덩어리이기 때문이다. 죽음의 과정에서 제일 처음 분해가 시작되는 지(地)의 요소는 유지, 지탱하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 태생적으로 집착의 에너지는 무질서에 반하는 질서의 에너지이다. 이 집착의 에너지가 분해되어 없어지니 얼마나 고통스럽고 무서울까? 그러나 애착의 에너지는 번뇌를 쌓는 부정적인 측면도 있지만, 생명 유지라는 관점에서는 긍정적이다. 그런데, 죽음의 과정을 직접 경험한다는 전제는 무언가 이것을 인식할 수 있는 주체(소멸하지 않고 바라보고 인식하는 무언가)가 있다는 것인데 서양에서는 이를 ‘영혼’이라고 부른다.

영혼은 숙련된 연주자이다. 연주하기 전에 영혼은 자신의 악기를 준비한다. 생명이 없는 오르간에서 연주자는 오르간으로 넣어지는 공기와 다른 존재이지만, 생명이 있는 오르간의 경우에는 오르간 연주자와 오르간을 울리는 공기는 하나이자 같은 것이다. 나는 그것으로 영혼은 공기나 숨과 똑같다고 말한다. -대니엘 던컨(Daniel Duncan/1686)



불교에서는 이 ‘영혼’이라는 존재도 분해하여 ‘바람(風大), 보는 것(見大), 인식하고 기억하는 것(識大), 바탕(空大)’으로 쪼개어 본다. 바람의 요소를 미세한 ‘에너지 몸’으로 해석하여 여기에는 무수한 생애의 흔적(봄, 기억, 바탕)이 복합적으로 존재하기 때문에 바람의 요소로 분해되는 시점을 중음신(中陰身/이전 삶과 다음 삶의 중간 단계)이라고 부른다. 즉, 물질도 정신도 아닌 이 에너지 체(subtle body)를 ‘바람’의 요소로 분해되는 단계로 설명한다. 그런데 이 중음신이 보신(報身: 깨달은 부처의 에너지 체/청정한 에너지)으로 변화될 수 있다면 그 사자(死者)는 다시 윤회(번뇌의 바다)의 굴레에 떨어지지 않는다고 한다. 그래서 살아있는 동안 죽음의 과정을 매일 매일 명상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티베트의 수행자들은 말한다. 즉, 바람의 요소로 분해되는 단계에서 보는 마음(見), 기억하는 마음(識)을 정화하여 최종적으로 맑고 깨끗한 바탕의 요소인 공성(空性)에 도달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이때의 공성(空性)은 앞에서 표현했던 7대의 요소들을 모두 포괄하는 근본 바탕이다. 중음신이 된 사자(死者)는 모두 이 과정을 거치지만 자신이 쌓아왔던 습관의 업력(카르마의 힘) 때문에 정화되지 못하고 다시 지나온 업의 족쇄에 묶여 재탄생(윤회)의 과정을 거친다고 한다. 따라서, 티베트 수행자들이 묘사하는 재탄생(윤회)의 과정은 바람의 요소로 분해되는 단계부터 아주 중요하고 이때 사자(死者)의 의식이 얼마나 공포와 고통에서 벗어나 깨어있는가가 중요하다고 한다.

우리가 중음도(中陰道)를 성취할 수 있기를,
환신(幻身)의 삼매를 성취하여 청명한 빛을 떠나
오직 죽음의 청명한 빛의 마음과
바람만인 것으로부터 일어나
우리가 영광으로 불타는 붓다의 상(相)과
아름다움을 성취한
환희신(歡喜身)에서 일어날 수 있기를,
달라이라마, 죽음을 말하다

황금 장식의 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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톨레도 대성당의 El Transparent

불당에 가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이 금박의 불상이다. 성당도 마찬가지다. 빛이 퍼져나가는 것을 표상한 성체도 금빛 장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유럽의 대성당 제대에도 황금 치장이 많다. 동양이나 서양이나 거룩한 장소에 황금 치장을 하는 이유가 금이 귀하고 비싸니까 ‘저의 공경심은 이 정도라구요!’라는 협박적? 그리고 과시적 마음의 표현으로 막연하게 생각했다. 궁금해서 구글 검색을 통해서 이 원인이 무엇일까? 찾아보았다.

부처님께서 살아 계실 때 몸에서 ‘자마염부단금색(紫磨閻浮檀金色)이 빛났다’고 합니다. 이 색깔은 ‘불타는 불빛의 색깔’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부처님 몸은 황금색이 아니라 ‘불타는 불의 색깔’이라고 해야 합니다.
 
불은 녹슬지 않고 그늘이 없습니다. 또한 모든 것을 정화시키기도 합니다. 불의 색깔은 곧 영혼의 색깔이며 살아있는 색깔입니다. 결코 인습이나 타성에 젖지 않는 색깔입니다. 그래서 불상을 불타는 색깔을 뜻하는 황금빛으로 칠하는 것입니다.
 
황금은 부자의 상징이 아닌 영혼의 색깔입니다. 그런데 무지한 이들은 이런 이치를 모르고 불상의 금빛도 부의 상징으로만 보아 황금 모으기에 혈안이 돼 있습니다. 불상은 왜 황금빛인가요



황금빛 치장은 불을 형상화한 것이라고 한다. 위 짧은 토막글을 통해서 “아하! 그렇구나”하는 이해와 함께 불의 의미에 대하여 잠시 생각해 보았다.

그러나, 활활 타오르는 불을 그릴 때 우리에게 떠오른 습관적인 표상은 빨간색이다. 어릴 때 나도 이점이 궁금했다. 불의 색은 노란색이 아닌가? 그런데 왜 빨간색으로 표시하지?

무찌르자 공산당!
 
원숭이 똥구녕은 빨게, 빨가면 사과 사과는 맛있어



빨간색은 정열/욕정, 분노/폭력, 활발함, 조급함을 상징한다. 반면에 노란색에서 느껴지는 감상은 빨간색의 이러한 지나침을 완화해주는 은은한 따뜻함이라고 표현해야 할까? 이렇게 금빛과 적색으로 일어나는 느낌은 확연하게 차이난다. 푸줏간, 창녀촌의 거리가 조성하는 적색 불빛은 그것으로 인하여 정욕과 탐욕적 폭력의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제어되지 않는 야생마 같은 감정의 동요랄까?

수도자들의 명상이 깊어지고 깨달음을 이루면 몸에서 황금빛이 드러난다는 의미가 인간에게 내재하고 있는 강렬한 부정적 에너지를 조복시켜 더이상 일어나지 않게 됨을 표현한 것이 아닐까? 고립을 선택하여 수행을 계속하다 보면 성욕이 엄청나게 일어난다. 수행 이론에서는 그 성욕의 에너지를 차가운 이성(지혜의 의지)의 힘으로 살살 갈무리하여 순화시키다 보면 내부에서 에너지 덩어리가 감지된다고 한다. 도가 수련에서는 이것을 단화기(丹化氣)라 표현하는데, 이 에너지 덩어리가 단전(배꼽 부위)에서 자라나 서서히 등줄기를 타고 올라가 머리 부위(정수리)에서 다시 전면을 통해 제자리로 돌아오는 순환의 과정을 임독유통(任督流通) 혹은 소주천(小周天)이라고 정의한다. 이 과정에서 그동안 쌓이고 잠재되었던 번뇌의 에너지들이 이 빛의 덩어리들과 융합되고 소멸하는단계에서 수행자의 신체에 빛이 난다고 한다. 특히 그 단화기(丹化氣)가 목을 통과하여 정수리로 가서 머릿골이 열리게되면 입천장에서 감로의 물이 흐르고 이때 머리 위에 둥근 빛의 띠를 볼수 있다고 한다. 마치 무더운 날씨에 뭉게구름이 비로 변하여 뜨거운 대지를 적셔주는 ‘가뭄에 단비’와 같다. 무더운 날씨와 뭉게 구름은 우리 정신의 번뇌 열과 복잡함과 혼탁함으로 연결시킬 수 있다. 그러나 수행자도 대부분의 경우 정욕의 에너지에 탐욕이 끈덕지게 달라붙어 감정과 감각의 노예가 되어버리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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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주천 수행


엘 트렌스파렌트(El Transparent)는 자연의 빛을 받아 투명하다는 의미라고 한다. 천장의 구멍도 활활 타오르는 느낌이다. 자세히 살펴보면 구멍 위에 앉아있는 돌출된 머리들이 불타오르는 불꽃의 꼭지 역할을 한다. 이것들은 인간의 부정적 감정 에너지를 상징한 것인가? 그런데 이곳으로 들어오는 투명한 빛으로 인하여 융합되고 있다. 천장은 인간으로 치면 정수리에 해당한다. 번뇌의 에너지가 아직 녹아들어 있는 단화기(丹化氣)도 머리까지 차올랐다. 그 머리에 조그마한 머리의 군상들이 아름답고 둥그럽게 둘러싸고 있다. 그래서 예술가들은 미치광이들이 많았던 것일까? 그들의 정신 안에 정열과 광폭이 융합되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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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항상 잡생각으로 머리를 꼭꼭 채워놓고 살고 있다. 그러나 조형물의 중심부에 성체가 황금빛으로 빛난다. 그 중심부는 아마도 심장이 아닐까? 머릿속에서 일어난 감정에 의해 동요되는 마음의 진동은 심장으로 그대로 전이된다. 그 주위의 천사들은 어쩌면 인간의 복잡한 감정 에너지들이 아닐까? 그 에너지는 단번에 제거될 수도 없고 제거 되도 안된다. 다만 순화되고 길들여야 한다. 빨간색의 심상은 정열과 폭력의 양면의 아수라이니까,

정열이 있기에 삶이 있고 생명이 유지된다. 그러나 과하면 그것이 폭력의 에너지로 변화한다. 이러한 생명의 뾰족한 에너지를 둥근 에너지로 바꾸어가는 과정에서 최종에 도달하는 몸의 표현이 황금빛이 아닐까? 중앙에 자리잡은 황금빛의 성체는 우리 인간에 내재되어 있는 깨끗한 마음의 빛을 표상한 것같다. 우리는 항상 바름과 바르지 않음에 대해 번뇌하면서 살아가고 있으니까, 그리고 그것은 우리가 이미 무엇이 바름이고 무엇이 바르지 않음인지를 태생적으로 입력되어 지니고 살아가는 빛의 존재라는 숨겨진 뜻이니,

모르면 윤회, 알면 해탈,



엉뚱하게 재미있다. 훗날 깨달음을 이룬 아기 예수를 안고서, 성모마리아는 배꼽 밑, 인간의 원초적 본능과 탄생의 자리에 놓여있다. 백색의 성모마리아는 아마도 복잡한 정신 에너지를 순화하는 서양 예술가들이 만들어낸 치유 메타포일지도 모르겠다. 순백의 하얀 이미지는 바로 깨끗함을 상징하니까,

그러나 순백보다 투명한 것이 한 수 위다. 투명한 것에는 걸림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천장에서 빛이 내려오나 보다. 엘 트렌스파렌트(El Transparent)는 자연의 빛을 받아 투명하다는 의미라고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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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 보니 도가의 수행도와 묘하게 연결된다. 백색의 성모마리아와 아기 예수는 단전(丹田)에서 일어나는 단화기(丹化氣)의 낳고 또 낳아(生生) 돌돌말아 일어나는 정화되고 정화되야 하는 생명 에너지의 표상?

도가수련에서 강조하는 상단전(上丹田)은 머릿골/천장, 중단전(中丹田)은 성체(심장), 하단전(下丹田)은 아기 예수를 품은 백색의 성모마리아/배꼽 밑 음부로 연결되어 해석해보니 그럴듯 하다.


빛을 프리즘으로 통과시키면 빨주노초파남보의 7가지 무지개 색깔로 분리된다. 인간의 감정 에너지들도 하나씩 실타래를 풀듯이 분리하여 7가지의 색깔로 분리시켜 몸의 중앙에 배치 시킨 차크라의 개념도 이러한 원리이겠지. 인간의 존재는 빛으로부터 왔으니 빛으로 변화해야 한다는 철학적 고찰을 실증하려는 수도의 경험과학이 아닌가? 그러나 복잡하게 얽혀있는 빛을 분리해내는 것은 너무나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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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Chakras and Body Health


[이태리 여행 前記] 여행 전기를 마치며/ 베네딕토 영성을 찾아서

작년 12월(2018년)부터 올해(2019년) 8월까지 저의 블록체인 기반 스팀잇 블로그에 유럽 여행기의 테마로 연재했던 글을 모아서 올립니다. 여행의 주제는 서양 전통 수도원 탐방이었습니다. 여행을 떠나기 전 틈틈히 가고 싶은 곳을 조사하면서 제 생각을 정리하고 여행을 계획 하였습니다. 그래서 5월 8일부터 43일간 유럽여행에 다녀왔습니다. 원래 계획과는 다르게 스페인뿐만 아니라 독일과 이탈리아를 둘러보았습니다. 스팀잇은 여타 개인 블로그와 다르게 글이력을 주제별로 열람할 수가 없기 때문에 저의 지난 글들을 다시 재검토하고 필요한 부분은 수정 및 정리할 계획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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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nastero di San Bendetto

내일(2019년 5월 7일) 스페인으로 여행을 떠난다. 태어나서 죽음을 맞이하는 모든 인간의 숙명을 생각한다면 굳이 여행을 떠난다고 말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떠나가는 것이 여행이기 때문이다. 여행전기를 준비하면서 처음에는 스페인만을 고집했다. 회사를 그만두고 전통 자연철학에 관심을 두고 (의도와는 다르게?) 공부해 보자고 마음먹었던 것이 결국에는 ‘영성’이라는 주제로 수렴되었다. 그래서 앞일을 모르는가 보다. 10년전에 나는 지금의 나의 모습이 이렇게 되리라고 생각해본적이 없다. 신해철님의 노래 제목처럼 ‘50년 후의 내모습’은 어떨까?

본래 가톨릭 가정에서 태어났지만 30대가 된 이후로는 성당에 가지 않았다. 지금까지 동양의 영성 전통에 뜻을 두고 공부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나에게 있어서 가톨릭은 마음의 고향과 같다. 절에 가는 것보다는 오히려 성당에 있을 때가 마음이 더 편안하다. 아마도 어릴 때부터 보고 자랐던 것이 돌아가신 어머님께서 늘 기도하셨던 모습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꼬꼬마부터 대학 학창 시절까지 주일학교에서 시간을 보내왔고 신부님이 된 몇몇 친구들이 있어서일까?

영성 흔적을 쫓아서 선택한 곳이 16세기 스페인의 이냐시오 성인, 아빌라 성녀 데레사와 십자가 성요한 이었다. 이분들의 영적 서적과 관련된 수도원 역사 서적들을 읽으면서 서양 수도원 전통의 체계화에 정신적이고 실천적 디딤돌이 되는 분이 베네딕토 성인임을 알게 되었다. 물론 베네딕토 성인과 이분들과의 사이에도 유명한 분들이 많다. 그러나 베네딕토 성인에게 관심이 가는 이유는 『규칙서』 때문이다. 공동체 생활의 규범을 다룬 『규칙서』에는 그 글을 쓴 베네딕토 성인의 사회/시대적 숨어 있는 맥락적 배려가 많이 있다고 한다.

그래서 여행의 마지막에는 성인의 은둔 생활 동굴 수행터 위에 지어졌다고 하는 ‘수비아코 수도원’에 방문하려고 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로마에서 ‘예수회’의 이냐시오 발자취를 다시 밟고 돌아올 생각이다. 여행이 시작된 계기가 이냐시오였고 로마는 제도화된 가톨릭의 총본산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참 아이러니하다. 예수 그리스도는 로마인들에 의해 십자가에서 처참하게 사형당하셨다. 그런데 예수그리스도의 팔로워들이 지배당했던 그 나라 로마에서 영적 지배자로 군림하였으니 말이다. 그러나 예수그리스도의 삶은 군림과는 거리가 멀다. 첫째가 꼴찌되고 꼴찌가 첫째되는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인생사이다.

낮은 데로 임하소서

나는 개인적으로 ‘깨달음의 사회화’라는 표현을 좋아한다. ‘깨달음’이라는 것은 혼자만의 것이 아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자랑질’하는 껍데기가 되어서도 안된다. 모든 수행 전통의 깨달음 속에는 ‘겸손함’, ‘온유함’, ‘자비심’이 흘러 넘쳐나서 드러나게 프로그램되어있다.


수행하는 사람일수록 정신병자가 되는 경우가 많다. 베네딕토 성인이 살았던 그 당시에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 당시 무대뽀 수행자들은 ‘원죄’라는 이름의 강박적 옭아 메어짐으로 제도권 교회의 정치적 선동과 권위에 고정관념화된 경향이 많았다. 물론 시대만 다를 뿐 지금도 그런 거 같긴 하다. 수행자들에게는 ‘해탈’, ‘천국’ 이런 것일 테고, 자본주의시대의 일반인들에게는 ‘돈, 이성, 명예’ 이런 것들이겠지. 그 목적을 수행하는 이유가 도대체 무엇 때문일까?

죄와 고통에 대한 편협한 집착은 오히려 우울증을 유발하고, 삶의 중요한 에너지인 공격성을 억압하도록 조장한다. 억압된 공격성은 잠재적 공격성으로 표출된다. 그리스도교 역사를 통틀어 공격적 충동은 타종교인들과의 관계에서 자주 나타난다. 때로 심한 자기 공격은 영성의 특징이 되기도 했다. 인간 정신의 구조를 도외시한 채 자신에게 분노했다. 자신에게 잔인한 자는 무의식적으로 주위의 사물도 거칠게 다룬다. 사물과 피조물에 하느님이 현존하심을 느끼지 못한다. 베네딕토의 영성은 공격적 정서에서 자유롭다. 수도교부들은 인간의 신성을 믿었다. 인간에게서 죄를 먼저 보지 않고 신성을 보았다. 모든 인간은 하느님이 창조하셨으므로 선하다. 그리스도는 우리 모두 안에 계시다. (중략)
 
“모든 일에 있어 하느님께서 영광을 받으시도록”
 
(중략) 하느님께서 영광 받으시기 위해서는 어떤 태도로 일해야 하는가? 베네딕토는 제57장에서 세 가지 태도를 제시한다. 겸손, 순명, 탐욕에서의 자유, 겸손은 기술자artifex는 ‘예술가’를 뜻하기도 한다가 일 자체에만 전념하는 것을 의미한다. 수도승은 자신을 내세우거나 자기 기술의 가치를 증명하는 데 노동을 악용하면 안된다. 안셀름 그륀의 베네딕도 이야기

20세기 인도의 한 영성인은 다음과 같은 실천 철학이 있었다. 이쪽의 신과 저쪽의 신이 이름은 다르지만 뭔가 통하는 것이 많다. 무엇이 중한디? ‘나’라고 불리는 ‘피터’는 이름일뿐 이름이 ‘나’를 대신할 수 없지 않은가? ‘이름’에 현혹되어서는 안 된다. 그 사람의 본질은 ‘이름’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름’은 단지 ‘이르게 하는 것다가서게 함, 소통하게 함’일 뿐이다. ‘종교’도 마찬가지, 그래서 나는 ‘영성’이라고 퉁치기를 좋아한다.

간디와 물레

행위만이 본분이요. 그 열매는 아니니라. 행위의 열매를 동기로 삼지 말 것이며, 행위를 피하려고 하지도 말지어다. [바가바드기타 제2장 47]

그대들의 권리(right)는 일하는 것이지 그 열매를 기대하는 것이 아니다. 주인이 자기 노예에게 말한다. “맡은 일이나 하고 농장에서 열매를 따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여라. 너는 내가 주는 것만 받으면 된다.” 신(神)은 똑같은 방식으로 우리를 제한한다. 그는 우리에게, 원한다면 일할 수 있다고, 그러나 일삵은 일체 자기가 결정한다고 말한다. 우리의 임무는 그분께 기도드리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이 일을 가장 잘할 수 있는 길은 곡갱이로 땅을 파고 강의 쓰레기를 치우고 우리의 뜰을 깨끗이 청소하는 것이다. 평범한 사람들을 위해 간디가 해설한 바가바드기타


8세기경의 베네딕토 규칙서 필사본

베네딕토 생전의 시대상은 정치 · 사회적으로 지금보다 분명히 더 어려웠다. 이른바 민족대이동 시대였다. 새 민족들이 이탈리아를 덮쳤고 국토는 초토화되었다. 로마제국은 멸망했다. 고대문화는 새 민족을 도야할 힘이 없었다. 정신적 공백이 생겼다. 재정 상태는 절망적이었다. 사람들은 더이상 농사를 지을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래 봤자 새로운 파괴가 노도처럼 밀려와 수확을 작살내리라는 것을 항상 염두에 두고 살았다. 교회도 내부 분열을 겪었다. 아리우스 이단이 교회를 분열시키고 재일치의 기운을 박탈했다. 아리우스파와 가톨릭 교회의 분쟁뿐만이 아니었다. 가톨릭 교회도 친비잔틴 세력과 친로마 세력으로 분열되었다. 로마제국 멸망 당시의 교회는 올바른 방향을 제시하지 못했고 버팀목이 되어 주지도 못했다. 이처럼 갈 곳 잃고 분열된 세상에서 베네딕토 수도원을 세우고 수도승들을 위한 『규칙서』를 썼다. 『규칙서』에서는 시대의 암울함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베네딕토는 난세를 한탄하고 있지만은 않는다. 그는 자생력 있는 소공동체를 세웠다. 안셀름 그륀의 베네딕도 이야기


베네딕토 성인이 은둔 생활하던 수행터

욕구를 자르면 영성은 공격성을 띤다. 자신에 대한 공격성이 남에게는 엄격함으로 표출된다. 회의(懷疑)를 억압하는 사람은 믿음이 없거나 다른 믿음을 가진 사람, 다른 영성의 길을 가는 사람 모두와 싸운다. 자신의 억압된 그림자 세계로 내려갈 용기를 지닌 사람만 이러한 분열에서 자유롭고, 자신과 타인에게 자비로울 수 있다. 자신의 억압된 그림자 세계로 내려갈 용기를 지닌 사람만 이러한 분열에서 자유롭고, 자신과 타인에게 자비로울 수 있다. 그는 자신의 억압된 부분을 남에게 투사하지 않고 남과 더불어 내적 변화의 길을 간다.
 
초기 수도승생활에서 겸손이 낮춤과 ‘흙’의 뉘양스만 지닌 것은 아니다. 온유와도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그리스어로 ‘겸손하다’는 말은 타페이노스tapeinos지만, 프라이스 prays를 ‘겸손하다’로 번역하는 경우도 잦다. 프라이스는 본디 ‘자비, 온유’를 뜻한다. 에바그리우스 폰티쿠스에게 온유는 영적 아버지의 표상이다. 온유란 자타自他를 부드럽게 대함이며 자타의 흠결과 약점에 자비를 베푸는 것이다. 온유한 사람한테서는 겸손한 자아인식으로 마음 깊이 변화되었음이 느껴진다. 신약성경은 겸손을 하느님에 대한 태도로만 보지않고, 사람을 대하는 태도로도 이해한다. 그래서 겸손을 온유, 부드러움, 관용 등과 한데 묶어 생각한다. 안셀름 그륀의 베네딕도 이야기

기도prays가 ‘겸손하다’는 의미라는 것을 처음 알았다. 무언가를 갈구한다는 것은 어찌보면 정성스러움이 전제되야할 것이고 정성스러움이란 자만심과는 반대되는 성정일 것이다. 그리고 정성스럽게 만드는 것은 바로 겸손함일 것이기 때문이다.


ps. 아씨시의 프란치스코 성인의 수행터도 방문할 예정이다. 전기 없이 그대로 여행지에서 작성할 것이다.

[스페인 여행 前記] 돈키호테에게 보여진 풍차: 일수사견(一水四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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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키호테의 풍차마을 Castle of Consuegra

“운명은 바야흐로 우리가 예상했던 것보다 더 좋은 방향으로 우리를 인도하고 있다. 자, 산초여, 저쪽을 보아라. 서른 아니 그보다 훨씬 많은 흉악한 거인들이 버티고 서 있다. 나는 저놈들과 싸워 다 죽인 후에 거기서 얻은 전리품으로 일약 거부가 된단 말이다. 이것이야말로 정의의 전투, 이 지구상에 널려 있는 악의 씨를 근절시키는 것만이 하느님에 대한 위대한 봉사인 것이다.” 돈키호테 제8장

대상은 그대로 있지만 그 대상을 보는 마음은 보는 이에 따라서 항상 고정되어 있지 않다는 ‘일수사견(一水四見)주1’을 400여년전 개그로 희화했던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의 풍차마을이 궁금하였다. 관련된 내용을 인터넷에서 검색하다가 돈키호테를 통해서본 현실의 의미란 글을 읽었다. 라만차는 스페인 내륙에 위치해 있다고 한다. 사진에 일렬로 늘어선 풍차들이 고성(古城)을 향하고 있다. 고성(古城)을 괴물로부터 지키고자 고래고래 악지르면서 풍차에게 고성(高聲)을 지르면서 달려들었던 돈키호테의 마음을 상상해볼 수 있겠다. 나도 약간 똘기가 있기 때문일까?


주1: 일수사견(一水四見)은 같은 물이지만, 천계(天界)에 사는 신(神)은 보배로 장식된 땅으로 보고, 인간은 물로 보고, 아귀는 피고름으로 보고, 물고기는 보금자리로 본다는 뜻


세상에는 누구에게나 똑같이 파악되는 하나의 ‘객관적 세계’란 아예 존재하지 않고, 오직 각각의 생물체가 구성하는 무수히 다양한 가상세계들만이 존재한다는 것이지요. 윅스퀼은 이런 가상세계를 환경세계Umwelt라고 불렀답니다. 주목해야 할 것은 이렇게 만들어진 환경세계들 사이에는 어느 것이 ‘참’이거나 ‘거짓’이라고 판단할 기준이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각자의 인식은 그가 구성한 환경세계에 의한 해석일 뿐이지요. 이를테면 들녂에 만발한 꽃은 아름다운 장식을 만들려는 소녀의 환경세계에서는 하나의 장식품입니다. 하지만 꽃줄기를 이용하여 꽃 속에 있는 먹이들에게로 가려는 개미의 환경세계에서는 길이고, 꽃을 뜯어먹는 소의 환경세계에서는 먹이지요. 돈키호테를 통해서본 현실의 의미

틀리다는 것과 다르다는 것은 분명이 다른 의미일 것이다. 자신만이 옳고 당신은 틀리다가 아니고 내가 보는 견해와 다른 사람이 보는 견해가 다르다는 것이다. 타자의 생각하는 바를 인정해주자는 것이다. 여기에는 상호존중의 미덕이 밑바탕에 깔려있다.

그런데 의문이 생긴다. 견해가 다르기 때문에 그것을 인정해 주어야한다면 선이냐 악이냐의 가치판단의 기준은 무엇이 되어야할 것인가? 아니면 선과 악이라는 가치 자체가 의미가 없다는 것인가?

일수사견의 의미는 견해의 다양성이라는 것에서 끝나지 않는다. 즉, 아귀가 물을 볼때 피고름으로 보는 그 해석틀(frame)을 천계에 사는 신이 물을 보배로 장식된 땅으로 보는 해석틀로 전환시키도록 도와주어야 한다는 당위성도 필요한 것이다. 그리고 자신도 신의 해석틀로 전환하자는 것이다. 아귀는 분노와 갈증의 고통에 휩싸여 있기 때문에 그 고통을 덜어주어야 한다는 공감共感/Sympathy의 실천적 의지를 숨기고 있는 것이다. 타자와의 조화라는 원대한 목적을 위해 우선 필요한 것이 타자의 정신적 해석틀을 먼저 이해해주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이해란 동참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나쁜 짓도 동참해야 하는 것일까? 그런데 우리가 나쁜짓이라고 말하는 바로 그 나쁜 짓을 과연 칼로 무자르듯이 반듯하게 정의내릴수 있다는 것일까?

이것이 항상 문제이다. 내가 상대방의 견해를 바로잡기 위해 소통하는 행위는 자칫하면 또 하나의 폭력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돈키호테를 보라! 풍차는 공공재산아니면 다른 누군가의 소중한 재산일 것인데, 자신만의 세계관에 갇히어 단정하여 앞뒤 안가리고 달려가 그 기물을 파손해 버린 것이다. 물론 자기가 당했지만,

때론 ‘하느님의 이름으로’라는 선의?우리가 믿는 하느님의 이름이 선의인가?로 포장된 가식주2으로 행해졌던 종교박해 혹은 종교 전쟁, ‘국민을 위해’라는 선의국민을 위한다는 선의가 하나로 고정될수 있는가?로 포장되는 정치적/개인적 탐욕들을 가려내는 견해 또한 중요한데 말이다.


주2: 가식이라고 표현하기도 어렵다. 왜냐하면 가식이란 것은 자신의 행위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면서 숨기고 진실된 행동인 척하는 것이다. 그러나 일수사견은 가식이 아니라 그렇게 보이기 때문에 그것이 진실된 행위라고 생각할수 밖에 없다. 의식이 그렇게 프로그램화 되어 있는데 어떻게 그를 탓할 것인가?


그러한 행동을 하는 가치 판단의 기준을 무슨 근거로 세워야만 하는 것일까? 모든 사람에게 이롭도록 하는 공동선의 견해가 과연 있는 것인가? 불교에서는 견해라는 것을 삿된 견해와 바른 견해로 나눈다. 그렇다면 무엇이 삿된 견해이고 무엇이 바른 견해인가?

그다음은 견해에 대한 실천의 문제이다. 견해에 의하여 행동하기 때문이다. 첫단추가 잘못 꿰어지면 어긋나게 되어있다. 다음 단계의 실천이 조화로 귀결될 것인지 분열로 귀결될 것인지는 그 행위에 따른 결과로 판단되어질 일이다. 세상을 보는 해석틀에 대한 실천도 그만큼 다양하기 때문이고 누군가에게는 그 실천행위가 폭력으로 비추어지기도 할 것이다. 그리고 아니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행위의 결과는 미래의 것이기 때문에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른다. 결국은 나몰라라 해야할 것인가?

모든 견해는 그것대로 다 의미가 있기 때문에 인정해주자는 다원주의도 자칫하면 병폐가 될수 있다. 분열 혹은 부조화를 조장할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공자 할아버지의 중용(中庸)주3이 중요한 미덕인 거 같다. 그러나 공자 할아버지만 이말씀을 하셨을까? 중용은 곧 조화로운 삶인데 이것은 세계 어느 곳에서나 시대를 불문하고 발견되는 미덕일 것이다.


주3: 희노애락이 발현되지 않은 상태를 중(中)이라 하고 발현되어 절도에 맞는 것을 화(和)라고 한다. 중(中)이라는 것은 천하의 큰 근본이고 화(和)라는 것은 천하의 달통한 도이다. 중(中)과 화(和)를 다하면 하늘과 땅이 자리잡고 만물이 자라나게 된다. 중용


공동선의 실천이란 것은 단순해야할 것이다. 생명을 함부로 죽이거나 괴롭히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이것이 가능할 것인가? 당장에 먹고 살기 위해서 고기를 먹고 농사를 지으면서 잡초, 풀벌레를 살생하지 않는가?

어찌 보면 우리 인간의 모든 실천 행위의 총체인 삶의 여정은 덜 폭력적인 방법으로 향하는 대상 놀음일 것이다. 종교, 정치, 철학이라는 생각 놀음(견해)을 다 떼고 뭐가 남아야할 것일까?

생각해볼 문제이다.


한국 최초의 물레방아는 연암 박지원 선생님께서

여기 물레방아라 불리우는 그 무엇인가가 있다. 물레방아를 보고 떠오르는 나의 심상心象, 마음의 모습은 무엇인가? 나는 돈키호테처럼 불의를 응징하는 기사도에 입각한 정의의 사도가 못된다.

본능에 충실한 수컷,

떡방아 찍는 것을 보면서 가루지기, 용녀, 변강쇠… 조선시대 포르노

나의 물레방아를 바라보는 심상은 아래 글을 통해 정당화된다. Dilthey아저씨 고마와요.

Dilthey는 이를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내성(內省)이 아니라 오직 역사를 통해서만 우리는 자기 자신을 알게 된다.” 자각의 주체는 일반적으로 그 자신의 자각을 내성하면서 자기 자신을 알고 이해하게 된다고 상상하지만, 새롭고 형성된 정신geist 과학(계보학에서 언어학까지)은 이것이 전혀 사실이 아니라는 점을 매우 분명히 밝혔다. 그들은 주관성이 자각 속에서 나타나는 거의 모든 것이 주관성으로는 보이지 않는 방대한 상호 주관적 그물망의 소산이라는 사실에 완전히 무지하기 때문이다. 부분적으로는 역사의 산물이기도 한 이 그물망은 Dilthey의 언급이 지적하였듯이, 주관성과 의식이 작동할 수 있게 하는 거대한 문화적 배경이다. 그리고 주관성은 내성으로 시간을 헛되이 보내며 스스로를 알고 있다고 상상하면서 여전히 이 형성적 그물망에 무지한 채로 지복 속에 머물러 있다. 이처럼 주관성은 정교한 거짓과 자기-기만의 그물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다. 켄 윌버의 통합영성

히히,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견해나 대상을 보고 즉각적으로 떠오르는 심상이라는 것은 오래도록 내려온 문화적 습성(해석의 그물망, 상호 주관적 그물망의 소산)이 무의식 속에서 자리 잡아서 나를 블랙홀처럼 끌어당겨 그렇게 떠오르게 만든다는 것이다.

땟치! 정교한 거짓과 자기-기만의 상호 주관적 그물망이라는 문화!

그니까 내책임이 아니다. 흐힛! 거기다가 나는 수컷 본성적 이데아를 충실히 따라갈 뿐이다. 내가 물레방아를 보고 음탕한 생각이 떠오르듯이 돈키호테의 심상도 아마 그러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결론 내리는 것이 정당할 것인가? 연암 박지원께서는 풍차를 설계하면서 이런 생각을하셨을까? 조선시대의 유학자셨으니 나랑은 달랐을 것이여. 그당시의 상호 주관적 그물망의 소산은 남녀칠세부동석이었지 아마?

이 또한 생각해 볼 문제다.


스페인 마드리드 남부에 위치한 라만차 지방은 마드리드 아토차 역에서 기차로 2시간 정도 소요된다고 한다. 우선 찜해둔다. 그런데 소설 속 상황이 세계적 관광 명소로 탈바꿈 되었다는 것은 그 나라에겐 축복일 것이다. 우리나라에도 그런 곳이 하나 있긴 하다. 그러나 세계적이진 않다.

춘향이 고향, 남원의 광한루

재작년에 남원골에 갈 기회가 있었는데 좀 초라한 느낌이었지만 광한루는 인상적이었다. 여기에 가보면 연못의 잉어들이 볼만하다. 커도 이렇게 큰 잉어들이 때지어 있는 것은 머리털 나고 처음 보았다. 간혹 사람의 얼굴을 닮은 인면어도 눈에 띈다고 한다. 나는 보지 못했지만 토실 토실하게 건강한 잉어들을 보는 재미가 있다. 잉어의 수명이 80년 정도 되는 것도 있다고 한다.

광한루의 인면어

이것 또한 인간이 잉어를 바라보고 투영된 심상心象

일수사견(一水四見)

근데 나는 이 잉어가 미녀와 야수의 야수로 보임

[스페인 여행前記] 동굴이 왜 수행자들의 공부방이 되는가? 자발적 고립은 양날의 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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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냐시오 성인의 동굴 수행터/Manresa cave

동굴은 구멍이다. 구멍은 비어있다. 비어있기 때문에 무언가 생겨날 잠재성1이 있는 것이다. 여성이 아름다운 것은 생명을 배태시킬 입구가 있기 때문이다. 동양에서 강조하는 없을 무는 아무것도 없다는 의미가 아니다. 비어있는 공간은 우리가 오감으로 감지못할 뿐이지 무한한 가능성을 품고 있는 형태형성장morphic field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정신적이건 물질적이건 비어있을때 소통의 여지가 있는 것이지 채워져있다면 막혀서 소통이 불가능하다. 공명한다는 것은 비어있다는 전제가 있어야 가능하기 때문이다. 고대 수행자들은 이것을 직관적으로 알았고 체험했기 때문에 자발적 가난함을 실천했던 것이다. 그러나 비어있기 때문에 항상 채워지고자하는 내적 혹은 외적 동인動因으로 인하여 금새 막혀버리는 가능성도 존재한다. 아니 오히려 더 쉽게 막힐수 있다. 청소를 안하면 계속 지저분해지는 것과같다. 깨끗할수록 때타기 쉬운 법이다. 그래서 그게 엄청난 병이 될수 있다. 그것을 극복하는 것도 수행이다. 수행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그에 상응하는 번뇌마煩惱魔도 더욱 강해진다고 한다.


주1 구멍 혈의 아래의 숫자 八(8)은 발생을 상징한다. 3과 8은 역학에서 동방木에 비유하는데 생성, 창조, 발생의 의미를 갖는다.


몬세라트 산에서 내려온 이냐시오 성인은 수도원에서 15㎞ 떨어진 만레사 마을 인근 동굴 안에서 1년간 영신수련을 했다. 이 시기 그는 관상과 내적 쇄신을 통해 은총의 지배를 받는 속량된 몸으로 그리스도의 새로운 인간(로마 6장 참조)으로 태어났다. 하지만 그의 영신수련은 결코 순탄치 않았다. 회심의 순간을 단 한시라도 잊지 않기 위해 몬세라트 산봉우리가 바라다보이는 동굴에서 그는 연일 단식과 고행을 하며, 때때로 나무를 깎은 탁발 그릇을 들고 문전걸식으로 생명의 끈을 유지한 채 추위를 견디며 어둡고 습한 동굴 안에서 하느님과의 만남에 전념했다. 한때는 어두운 밤에 갇힌 자신의 영에서 벗어나지 못해 자살을 생각할 만큼 우울증에 빠지기도 했다. 그래서 그의 영신수련에는 기도방법뿐 아니라 삶의 태도를 근본적으로 바꾸려는 지력과 의지의 수련법도 어우러져 있다. [스페인 가톨릭 문화와 역사 탐방] (4-끝)로욜라·몬세라트·만레사

폐관閉關이란 수행용어가 있다. 그대로 직역하면 문을 닫아걸어 잠근다는 뜻인데 수도자들은 일정기간 동안 외부와의 소통을 단절하고 수행에만 열중한다. 그 이유는 감각의 문이라는 오관눈/코/입/귀/몸의 감각, 五官을 독하게 차단하는 것이다. 짧게는 100일 길게는 1,000일 수행2을 한다. 그러나 생명체의 본성은 활동성에 있기때문에 가두면 가둘수록 이것이 안에서 쌓이다가 급기야 반대로 방향을 틀어 뻗어나가는 압력이 증가하기 마련이다. 압력밥솥을 상상해보자. 강하게 막을수 있는 정신적/신체적 여력이 충분하지 않으면 폐관수행이 실패한다. 더큰 문제는 정신적/신체적 질병이 발생하는 것이다.


주2 전통 수도 신체학에서는 대개 30일 주기로 3번을 사이클로 가정할 때 신체나 정신의 1주기가 완성된다고 한다. 선방에서 100일 수행을 하는 이유가 인체를 이루는 지수화풍 사대의 생성과 소멸의 주기가 3개월(대략 100일)을 기준으로 마디를 이루고 3년(1,000일)을 기준으로 대순환이 되기 때문에 수행을 발심하여 이 기간동안 용맹정진을 한다면 공덕변화의 마디를 생성시킨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것을 생명에너지라고 해두자. 그것은 강력한 욕구가 될 수도 있고 분노가 될 수도 있다. 욕구나 분노의 힘은 엄청난 힘을 발휘한다. 일상생활의 에너지보다 분노와 탐욕의 몰입 강도가 훨신 크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러한 에너지들은 어디론가 빠져나가거나 길들여져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그 강력한 활동성의 욕구 에너지가 폭발되어 정신적 혹은 신체적 장애로 발현될 위험이 항상 도사리고 있다. 그렇기때문에 티베트에서는 폐관수련이 가능한 수도자를 스승이 엄밀하게 심사하여 결정한다고 한다.

그러나 세상과의 소통이 단절되면 그만큼 내적 자기성찰의 시간도 따라서 풍부해진다. 그 강력한 욕구에너지를 정신의 에너지로 쌓고 길들여 긍정적으로 순화시키는 것이 바로 폐관수행의 요체이다. 따라서 이 수행은 양날의 칼처럼 순기능과 역기능이 항상 공존하는 것이다. 겉으로 본다면 수행자와 죄수는 그들이 거주하는 장소와 형식면에서 자발성의 있고 없음의 차이뿐이다. 그러나 그 자발적 수행도 폐관이 극에 달하여 자신의 정신/생명 에너지가 쌓아지는 과정에서 제대로 갈무리되지 못한다면 울체가 되어 죄수의 행동처럼 변질되어 버린다.

Kundalini Awakening Symptoms

쿤달리니 수행증후군이 비슷한 예이다. 다양한 종류의 수행 전통들이 있지만 갈무리된 에너지들이 타자와의 적절한 소통으로 순화되지 않는 자발적 고립을 선택한 만큼 정신적 혹은 육체적 어려움을 크게 발생시킬 수 있다. 쉽지않은 길을 선택한 만큼 위험성도 비례하여 잠재한다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동굴 수행자들 중에 정신병자나 사회적 관계에서 악영향을 미치는 사람들이 많다.

내눈을 바라봐


본질적인 질문이 있다. 수행자들이 왜?
깨달음을 추구하는 것인가?

어느 스님에게서 들은 법문이 있다. 깨달음을 열반, 기독교적 용어로 천국이라고 표현할 수 있겠는데 쉽게 설명하자면 번뇌의 소멸기독교적 용어로 하느님과 항상 함께함이다. 거기?는 탐욕, 분노, 어리석음이 없는 정신적인 안식처이다. 번뇌의 잠재성도 없는 경지이다. 그런데 그렇게 번뇌를 완전히 소멸시킨다는 것이 왜? 필요한가?

모든 사람에게 이익이 되게함이다. 즉, 깨닫기위해서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이익이 되기위해서 수행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모든 사람의 번뇌 소멸(해탈)로 인도하기 위해 수행을 하는 것이라고 한다. 나만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을 천국으로 가게하기 위해서 수행을 한다는 것이다. 수행의 최종목적은 홀로서기가 아니라 함께서기이다. 모든 사람에게만 국한되어서도 안된다. 생명, 나를 둘러싼 우주까지도 여기에 포섭된다.

그래서 대승(大乘)

즉, 크나큰 수례라는 것이다. 해탈 혹은 천국으로 인도하는 짐꾼,

그런데 그러기 위해서 폐관수행처럼 자발적 고립을 선택한다는 역설이 있다.

소요산의 자재암

원효대사가 창건한 자재암은 원효대사가 요석공주의 세속의 인연을 맺은 뒤 이곳에 초막을 짓고 수행하고 있을 때, 관세음보살이 변신한 아름다운 여인이 유혹을 하였다. 설법으로 유혹을 물리친 원효대사는 이내 그 여인이 관세음보살이었음을 깨닫고 더욱 수행에 정진하는 한편, 관세음보살을 친견하고 자재무애의 수행을 쌓았다는 뜻에서 절을 짓고 이름을 자재암이라 했다고 한다. Naver 블로그에서

원효 스님께서도 동굴수행 과정에서 여러가지 환영을 경험하셨을 것이다. 소요산의 자재암에 재작년에 가보았다. 거기서 돌아가신 어머님을 생각하면서 절을 하였다. 이번에는 스페인 만레사 이냐시오 성인의 수행터에서 어머님을 위해 당신의 손때가 묻은 기도서와 묵주를 가지고 기도를 해야겠다.

[스페인 여행前記] Fabada Asturiana 스페인의 순대국?

Fabada Asturiana

스페인은 유럽의 과거를 보존하려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가끔 든다. 한때는 자연의 일부로 여겨질 만큼 일상 생활에서 흔히 볼 수 있었지만 다른 데서는 벌써 오래전에 사라진 소리들과 냄새들과 직업들. 물건을 사라고 구성지게 뽑아대는 사람의 목소리, 집들 사이로 울려 퍼지는 호객 소리, 손수레와 당나귀가 멘 광주리에 담긴 과일, 생선, 꽃, 이 세상을 더 풍요하면서도 더 가난하게 만든 사회 정의와 기술과 대기업 때문에 이제는 무용지물이 된 그 모든 것 산티아고 가는 길

세스 노터봄이 이 책을 출판했을 때가 1990년대 초반인 걸로 안다. 벌써 30년 가까이 되어가니 스페인의 세태도 분명히 변화되었을 것이다. 그가 시장바닥의 풍경을 묘사하면서 쓴 토막글을 메모해 두었다. 우리의 재래시장도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상황이 어찌 스페인만의 문제일까? 아마도 유럽의 모든 곳 아니 사람이 복잡하게 모여드는 이름하야 문명화된 곳은 이같은 변화의 바람을 피해갈수 없을 것이다. 사람도 늙어가는데 하물며 그속의 사람사는 공간이 변하지 않고서야 과연 문명이라고 표현할수 있을까? 단지 변해가는 속도의 차이만 있을 뿐, 그리고 과거를 회상하며 아쉬워하고 그리워할 뿐이다. 변화의 속도는 아마 구성원의 기질과도 연관될 것이다. 그것보다 스페인은 기독교와 이슬람의 동서양 문화 용광로melting pot라서 매력이 있는 것이 아닐까? 그런데 30년이 지나버린 이 시점에서 스페인의 재래시장에서 서민음식을 먹어보고 싶다. 그리고 낯선 땅의 시끌뻑적찌근한 분위기를 느껴보고 싶다. 서양은 서민들도 세련되고 고상하다는 그러한 환상을 무참히 깨고싶다. 그냥 사람사는 곳은 똑같다고,

스페인의 시장바닥에서 부담없이 먹을 수 있는 음식이 무얼까? 생각하다가 Fabada Asturiana를 먹었다는 세스 노터봄의 글귀를 보고 인터넷을 검색하였다. 먹어본 것도 같다. 통조림으로,

이제는 다국적 교류의 시대이니 웬만한 음식은 창고형 매장에서 쉽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아버지께서 해외 출장에서 돌아오실 때 이것과 비슷한 소세지가 들어간 콩 스튜 통조림을 자주 사오곤 하셨다. 순대가 아닌 소세지만 들어가 있을 뿐, 이 스페인의 순대국이 스페인의 아스투리아스 지방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스페인 지도/ 아스투리아스 영역

해안선은 단조롭고 평야는 좁으며, 남쪽은 메세타(Meseta)의 북쪽 한계인 칸타브리아(Cantcbrica) 산맥을 등지고, 서쪽은 산지를 사이에 두고 이베리아 반도의 북서쪽을 차지하는 갈리시아(Galicia) 지방과 접해 있다. 비스카야(Viscaya) 만에 면해 있기 때문에 기후는 편서풍의 영향을 받아 온난 다습한 해양성 기후를 나타내며, 연 강수량도 1,000mm 이상이다. 칸타브리아 산맥에서 흘러내리는 하천은 모두 짧고 깊은 협곡을 형성하고, 하류에 작은 선상지를 발달시킨 곳도 있다. 고산 지대에 있으며, 10월에서 5월까지 눈이 내린다. 겨울엔 주로 비와 화창한 날이 번갈아가며 있다. 위키백과

고산지대라 거기에 살았던 사람들은 아마도 기름기 있는 음식을 즐겨 먹었을 지도 모르겠다. 추웠을 테니까, 그래서 콩과 돼지의 느끼한 조합으로 스튜를 만들었던 것이 아닐까? 음양오행에서 콩과 돼지는 水의 속성을 간직하고 있다. 그래서 에너지 저장고의 역할을 한다. 온난다습한 해양성 기후라고 하지만 겨울철 저온의 습한 날씨라면 우중충한 기분과 함께 스산함을 느꼈을 것이다. 이럴 때는 적당한 기름기와 따뜻한 독주가 필요할 것 같다. 나는 아주 추울때 재래시장에서 따뜻한 순대국에 소주 한잔이 생각난다. 순대국은 아주 추울때 먹어야 제맛이다.

스페인의 서민들은 Fabada Asturiana에 와인을 곁들여 먹을 것인가? 순대국의 느끼함을 새우젓, 들깨, 시뻘건 다대기로 메꾸어주는 조합을 그들은 어떤 식으로 해결했을지 궁금하다. 어찌 보면 그들에게 느끼함이란 생소한 느낌일지도 모르겠다.

내가 맛본 통조림 요리에서는 스튜에 녹아들어 있는 신맛이 돼지와 콩의 느끼함을 상쇄해주는 역할을 해주었던거 같다. 신맛은 木에 해당되어 水生木으로 강한 水의 기운을 흡수발산 시키는 역할을 해준다. 매운 성분이 첨가되는 경우는 목의 발생력을 극대화 시켜 뿜어주는 것이다. 그래서 나무에 꽃이 피는 것(木生火)을 火의 작용이라고 하는데 일반적으로 맵다는 것을 金에 비유하기도 하지만 작용의 측면에서 火로 보기도 한다. 매운 음식을 먹으면 몸속이 퍼지는 느낌이 들고 땀을 흘리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그리고 술의 속성도 火로 본다.

내가 즐겨 먹는 할매순대국

엉뚱한 상상을 한다. 산티아고로 가는 구도자들은 살면서 단 한번 만이라도 성 야고보 성인이 뭍혀있는 그곳에 함께있기 위해서 아스투리아스 지방까지 다다랐을 것이다. 이제 목적지가 멀지 않았다. 그러나 춥고 배가 고프다. 더 나아갈 기력도 없다. 영적인 갈구함을 지속시킬 정신적 동인도 육체적 무너짐과 환경적 혹독함을 극복하기에는 한계가 있다. 스무고개의 19고개에서 최극의 시련이 다가왔다.

재래 시장의 마음좋은 아즈매는 그 구도자에게 따뜻한 Fabada Asturiana를 말아주지 않았을까? 와인과 함께,

그러다가 눌러앉았다는…
(이건 아니다. 그러나 수컷 총각적 본성에 충실한 나는 아즈매가 아름답게 보여서 그만…)

스페인을 가로 지르는 약 800km의 순례길

고통을 대하는 가장 이상적인 자세

엔카르나시온 수도원 (스페인 아빌라)

고통은 누구나 벗어나고 싶어한다. 특히 원인도 없이 받는 고통이나 핍박은 더욱 그러할 것이다. 알고서 얻어 맞는 폭력도 아파 죽겠는데, 갑자기 당하는 폭력은 얼마나 황당하고 힘들까? 아픔에 더하여 억울함까지 덧붙여지니 말이다. 즉, 육체적 괴로움과 정신적 고통이 짬뽕되어 무한확장된다. 그리고 가학자에게 분노가 치성하여 ‘나’의 마음에는 아픔에 대한 분노와 적에 대한 분노로 다른 생각이 끼어들 틈이 없어진다. 타인이 나에게 주는 정신적 가학도 마찬기지,

그리스도교 신자의 관점에서 예수님의 수난은 우리의 죄를 사해 주기위해서 대신 희생당하셨다는 원대한 주입식 이해가 따르지만 합리적인 이성을 가진 ‘나’라는 인간으로서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하느님이 초딩도 아니고, 그런식으로 해석해서는 안된다.

불교에서는 용서라는 말이 통용되지 않는다. 모든 것은 의지와 말과 행동의 결과로 이어지는 것이며, 그 업(Karma)의 발현은 누구도 가로챌수 없다. 따라서 용서란 말은 자기 자신과의 화해이지 상대방을 향한 것이 아니다. 적이 나를 괴롭힐 때, 그가 받을 업(Karma)의 결과를 생각하며 연민의 마음을 일으키고, 과거의 빚을 갚을 기회를 준 것에 기뻐하며 감사의 마음을 일으킨다면 내가 행복해지는 것이다. 달라이 라마의 입보리행론 강의/이종복 옮김

그리스도교 수행자들이나 불교의 두타행자들이나 기승전-고행으로 삶을 끝마친데는 원대한 이유가 있었다.  그리스도교와 불교 수행의 접점, 고통(一切皆苦)

그래피티는 더이상 낙서가 아니다

스페인의 세고비아 수로를 무작정 따라가다 만만한 높이의 수로 사이의 낙서를 발견했다

나이가 1,500년도 넘은 수로와 그 길을 따라 지어진 건물벽에 그려진 낙서가 예술적이다. MEAS가 무슨 뜻일까? 구글 신에게 물어보니 아무 대답이 없다. 다만, 측정(Measurement)의 약자라고 나온다. 뜻이 뭐 중요한가? 잘 어울리면 되지. 미술작품을 보면 구태여 작가의 의도가 무엇인지 생각하려고 노력한다. 그런데 그냥 좋으면 좋은거지 뭐, 느낌이 중요하지. 갑자기 감이 먹고 싶다.

이성(異性)을 좋아할 때 이유가 있는가? 그냥 좋지.

피렌체로 가는 기차안에서 만난 반가운 시바(SHIVA)

나는 시바(SHIVA)라는 단어를 좋아한다. 우선 단어의 발음이 찰지다. 욕의 약어로 끝말에 애드립 넣기 딱 좋다. 그리고 일본의 시바견도 귀엽다. 게다가 인도 시바 신의 의미도 깊다. 파괴의 신이라고 한다. 이렇게 시바(SHIVA)에서 느껴지는 어감은 다차원적이라서 아주 좋다. (내가 시바를 좋아하는 이유 설명서) 그런데 기차안에서 이 그림을 보니 아주 반가왔다. 그래서 찍었다. 시바,

이태리 로마의 중고책 가게 옆에 그려진 낙서

여자의 순정을 이용하는 수컷 제비의 흑심을 표현한 것일까? 그 뒤에 파란 유령이 여자를 타겟으로 한 제비의 마음을 나타낸 것일까? 아니면, 이 제비를 혼내주려는 정의의 유령을 표현한 것일까? 아니면, 수컷 제비를 혼내주려는 여자 마법사가 유령을 불러들이고 있는 것일까? The Cover라고 쓰여진 걸로 봐서는 수컷 제비의 흑막을 나타낸 것같기도 하고, 아니면 이 그림 완성후에 또다른 누군가(그래피티 예술가) 푸른 외계인 닮은 유령을 덧붙인 것이기도 하고…

모르겠다. 그냥 그림이 좋으니까 좋다. 의미를 부여하지 말자. 특히, 사랑놀음에서 의미를 부여하면 복잡해진다. 여기서 갑과 을의 관계는 개빡친다.

담쟁이가 조화롭게 그림을 덮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