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당에 가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이 금박의 불상이다. 성당도 마찬가지다. 빛이 퍼져나가는 것을 표상한 성체도 금빛 장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유럽의 대성당 제대에도 황금 치장이 많다. 동양이나 서양이나 거룩한 장소에 황금 치장을 하는 이유가 금이 귀하고 비싸니까 ‘저의 공경심은 이 정도라구요!’라는 협박적? 그리고 과시적 마음의 표현으로 막연하게 생각했다. 궁금해서 구글 검색을 통해서 이 원인이 무엇일까? 찾아보았다.
부처님께서 살아 계실 때 몸에서 ‘자마염부단금색(紫磨閻浮檀金色)이 빛났다’고 합니다. 이 색깔은 ‘불타는 불빛의 색깔’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부처님 몸은 황금색이 아니라 ‘불타는 불의 색깔’이라고 해야 합니다.
불은 녹슬지 않고 그늘이 없습니다. 또한 모든 것을 정화시키기도 합니다. 불의 색깔은 곧 영혼의 색깔이며 살아있는 색깔입니다. 결코 인습이나 타성에 젖지 않는 색깔입니다. 그래서 불상을 불타는 색깔을 뜻하는 황금빛으로 칠하는 것입니다.
황금은 부자의 상징이 아닌 영혼의 색깔입니다. 그런데 무지한 이들은 이런 이치를 모르고 불상의 금빛도 부의 상징으로만 보아 황금 모으기에 혈안이 돼 있습니다. 불상은 왜 황금빛인가요
황금빛 치장은 불을 형상화한 것이라고 한다. 위 짧은 토막글을 통해서 “아하! 그렇구나”하는 이해와 함께 불의 의미에 대하여 잠시 생각해 보았다.
그러나, 활활 타오르는 불을 그릴 때 우리에게 떠오른 습관적인 표상은 빨간색이다. 어릴 때 나도 이점이 궁금했다. 불의 색은 노란색이 아닌가? 그런데 왜 빨간색으로 표시하지?
무찌르자 공산당!
원숭이 똥구녕은 빨게, 빨가면 사과 사과는 맛있어
빨간색은 정열/욕정, 분노/폭력, 활발함, 조급함을 상징한다. 반면에 노란색에서 느껴지는 감상은 빨간색의 이러한 지나침을 완화해주는 은은한 따뜻함이라고 표현해야 할까? 이렇게 금빛과 적색으로 일어나는 느낌은 확연하게 차이난다. 푸줏간, 창녀촌의 거리가 조성하는 적색 불빛은 그것으로 인하여 정욕과 탐욕적 폭력의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제어되지 않는 야생마 같은 감정의 동요랄까?
수도자들의 명상이 깊어지고 깨달음을 이루면 몸에서 황금빛이 드러난다는 의미가 인간에게 내재하고 있는 강렬한 부정적 에너지를 조복시켜 더이상 일어나지 않게 됨을 표현한 것이 아닐까? 고립을 선택하여 수행을 계속하다 보면 성욕이 엄청나게 일어난다. 수행 이론에서는 그 성욕의 에너지를 차가운 이성(지혜의 의지)의 힘으로 살살 갈무리하여 순화시키다 보면 내부에서 에너지 덩어리가 감지된다고 한다. 도가 수련에서는 이것을 단화기(丹化氣)라 표현하는데, 이 에너지 덩어리가 단전(배꼽 부위)에서 자라나 서서히 등줄기를 타고 올라가 머리 부위(정수리)에서 다시 전면을 통해 제자리로 돌아오는 순환의 과정을 임독유통(任督流通) 혹은 소주천(小周天)이라고 정의한다. 이 과정에서 그동안 쌓이고 잠재되었던 번뇌의 에너지들이 이 빛의 덩어리들과 융합되고 소멸하는단계에서 수행자의 신체에 빛이 난다고 한다. 특히 그 단화기(丹化氣)가 목을 통과하여 정수리로 가서 머릿골이 열리게되면 입천장에서 감로의 물이 흐르고 이때 머리 위에 둥근 빛의 띠를 볼수 있다고 한다. 마치 무더운 날씨에 뭉게구름이 비로 변하여 뜨거운 대지를 적셔주는 ‘가뭄에 단비’와 같다. 무더운 날씨와 뭉게 구름은 우리 정신의 번뇌 열과 복잡함과 혼탁함으로 연결시킬 수 있다. 그러나 수행자도 대부분의 경우 정욕의 에너지에 탐욕이 끈덕지게 달라붙어 감정과 감각의 노예가 되어버리기도 한다.
엘 트렌스파렌트(El Transparent)는 자연의 빛을 받아 투명하다는 의미라고 한다. 천장의 구멍도 활활 타오르는 느낌이다. 자세히 살펴보면 구멍 위에 앉아있는 돌출된 머리들이 불타오르는 불꽃의 꼭지 역할을 한다. 이것들은 인간의 부정적 감정 에너지를 상징한 것인가? 그런데 이곳으로 들어오는 투명한 빛으로 인하여 융합되고 있다. 천장은 인간으로 치면 정수리에 해당한다. 번뇌의 에너지가 아직 녹아들어 있는 단화기(丹化氣)도 머리까지 차올랐다. 그 머리에 조그마한 머리의 군상들이 아름답고 둥그럽게 둘러싸고 있다. 그래서 예술가들은 미치광이들이 많았던 것일까? 그들의 정신 안에 정열과 광폭이 융합되었을 테니까,
우리는 항상 잡생각으로 머리를 꼭꼭 채워놓고 살고 있다. 그러나 조형물의 중심부에 성체가 황금빛으로 빛난다. 그 중심부는 아마도 심장이 아닐까? 머릿속에서 일어난 감정에 의해 동요되는 마음의 진동은 심장으로 그대로 전이된다. 그 주위의 천사들은 어쩌면 인간의 복잡한 감정 에너지들이 아닐까? 그 에너지는 단번에 제거될 수도 없고 제거 되도 안된다. 다만 순화되고 길들여야 한다. 빨간색의 심상은 정열과 폭력의 양면의 아수라이니까,
정열이 있기에 삶이 있고 생명이 유지된다. 그러나 과하면 그것이 폭력의 에너지로 변화한다. 이러한 생명의 뾰족한 에너지를 둥근 에너지로 바꾸어가는 과정에서 최종에 도달하는 몸의 표현이 황금빛이 아닐까? 중앙에 자리잡은 황금빛의 성체는 우리 인간에 내재되어 있는 깨끗한 마음의 빛을 표상한 것같다. 우리는 항상 바름과 바르지 않음에 대해 번뇌하면서 살아가고 있으니까, 그리고 그것은 우리가 이미 무엇이 바름이고 무엇이 바르지 않음인지를 태생적으로 입력되어 지니고 살아가는 빛의 존재라는 숨겨진 뜻이니,
모르면 윤회, 알면 해탈,
엉뚱하게 재미있다. 훗날 깨달음을 이룬 아기 예수를 안고서, 성모마리아는 배꼽 밑, 인간의 원초적 본능과 탄생의 자리에 놓여있다. 백색의 성모마리아는 아마도 복잡한 정신 에너지를 순화하는 서양 예술가들이 만들어낸 치유 메타포일지도 모르겠다. 순백의 하얀 이미지는 바로 깨끗함을 상징하니까,
그러나 순백보다 투명한 것이 한 수 위다. 투명한 것에는 걸림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천장에서 빛이 내려오나 보다. 엘 트렌스파렌트(El Transparent)는 자연의 빛을 받아 투명하다는 의미라고 하니까,
그러고 보니 도가의 수행도와 묘하게 연결된다. 백색의 성모마리아와 아기 예수는 단전(丹田)에서 일어나는 단화기(丹化氣)의 낳고 또 낳아(生生) 돌돌말아 일어나는 정화되고 정화되야 하는 생명 에너지의 표상?
도가수련에서 강조하는 상단전(上丹田)은 머릿골/천장, 중단전(中丹田)은 성체(심장), 하단전(下丹田)은 아기 예수를 품은 백색의 성모마리아/배꼽 밑 음부로 연결되어 해석해보니 그럴듯 하다.
빛을 프리즘으로 통과시키면 빨주노초파남보의 7가지 무지개 색깔로 분리된다. 인간의 감정 에너지들도 하나씩 실타래를 풀듯이 분리하여 7가지의 색깔로 분리시켜 몸의 중앙에 배치 시킨 차크라의 개념도 이러한 원리이겠지. 인간의 존재는 빛으로부터 왔으니 빛으로 변화해야 한다는 철학적 고찰을 실증하려는 수도의 경험과학이 아닌가? 그러나 복잡하게 얽혀있는 빛을 분리해내는 것은 너무나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