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은 바야흐로 우리가 예상했던 것보다 더 좋은 방향으로 우리를 인도하고 있다. 자, 산초여, 저쪽을 보아라. 서른 아니 그보다 훨씬 많은 흉악한 거인들이 버티고 서 있다. 나는 저놈들과 싸워 다 죽인 후에 거기서 얻은 전리품으로 일약 거부가 된단 말이다. 이것이야말로 정의의 전투, 이 지구상에 널려 있는 악의 씨를 근절시키는 것만이 하느님에 대한 위대한 봉사인 것이다.” 돈키호테 제8장
대상은 그대로 있지만 그 대상을 보는 마음은 보는 이에 따라서 항상 고정되어 있지 않다는 ‘일수사견(一水四見)주1’을 400여년전 개그로 희화했던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의 풍차마을이 궁금하였다. 관련된 내용을 인터넷에서 검색하다가 돈키호테를 통해서본 현실의 의미란 글을 읽었다. 라만차는 스페인 내륙에 위치해 있다고 한다. 사진에 일렬로 늘어선 풍차들이 고성(古城)을 향하고 있다. 고성(古城)을 괴물로부터 지키고자 고래고래 악지르면서 풍차에게 고성(高聲)을 지르면서 달려들었던 돈키호테의 마음을 상상해볼 수 있겠다. 나도 약간 똘기가 있기 때문일까?
주1: 일수사견(一水四見)은 같은 물이지만, 천계(天界)에 사는 신(神)은 보배로 장식된 땅으로 보고, 인간은 물로 보고, 아귀는 피고름으로 보고, 물고기는 보금자리로 본다는 뜻
세상에는 누구에게나 똑같이 파악되는 하나의 ‘객관적 세계’란 아예 존재하지 않고, 오직 각각의 생물체가 구성하는 무수히 다양한 가상세계들만이 존재한다는 것이지요. 윅스퀼은 이런 가상세계를 환경세계Umwelt라고 불렀답니다. 주목해야 할 것은 이렇게 만들어진 환경세계들 사이에는 어느 것이 ‘참’이거나 ‘거짓’이라고 판단할 기준이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각자의 인식은 그가 구성한 환경세계에 의한 해석일 뿐이지요. 이를테면 들녂에 만발한 꽃은 아름다운 장식을 만들려는 소녀의 환경세계에서는 하나의 장식품입니다. 하지만 꽃줄기를 이용하여 꽃 속에 있는 먹이들에게로 가려는 개미의 환경세계에서는 길이고, 꽃을 뜯어먹는 소의 환경세계에서는 먹이지요. 돈키호테를 통해서본 현실의 의미
틀리다는 것과 다르다는 것은 분명이 다른 의미일 것이다. 자신만이 옳고 당신은 틀리다가 아니고 내가 보는 견해와 다른 사람이 보는 견해가 다르다는 것이다. 타자의 생각하는 바를 인정해주자는 것이다. 여기에는 상호존중의 미덕이 밑바탕에 깔려있다.
그런데 의문이 생긴다. 견해가 다르기 때문에 그것을 인정해 주어야한다면 선이냐 악이냐의 가치판단의 기준은 무엇이 되어야할 것인가? 아니면 선과 악이라는 가치 자체가 의미가 없다는 것인가?
일수사견의 의미는 견해의 다양성이라는 것에서 끝나지 않는다. 즉, 아귀가 물을 볼때 피고름으로 보는 그 해석틀(frame)을 천계에 사는 신이 물을 보배로 장식된 땅으로 보는 해석틀로 전환시키도록 도와주어야 한다는 당위성도 필요한 것이다. 그리고 자신도 신의 해석틀로 전환하자는 것이다. 아귀는 분노와 갈증의 고통에 휩싸여 있기 때문에 그 고통을 덜어주어야 한다는 공감共感/Sympathy의 실천적 의지를 숨기고 있는 것이다. 타자와의 조화라는 원대한 목적을 위해 우선 필요한 것이 타자의 정신적 해석틀을 먼저 이해해주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이해란 동참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나쁜 짓도 동참해야 하는 것일까? 그런데 우리가 나쁜짓이라고 말하는 바로 그 나쁜 짓을 과연 칼로 무자르듯이 반듯하게 정의내릴수 있다는 것일까?
이것이 항상 문제이다. 내가 상대방의 견해를 바로잡기 위해 소통하는 행위는 자칫하면 또 하나의 폭력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돈키호테를 보라! 풍차는 공공재산아니면 다른 누군가의 소중한 재산일 것인데, 자신만의 세계관에 갇히어 단정하여 앞뒤 안가리고 달려가 그 기물을 파손해 버린 것이다. 물론 자기가 당했지만,
때론 ‘하느님의 이름으로’라는 선의?우리가 믿는 하느님의 이름이 선의인가?로 포장된 가식주2으로 행해졌던 종교박해 혹은 종교 전쟁, ‘국민을 위해’라는 선의국민을 위한다는 선의가 하나로 고정될수 있는가?로 포장되는 정치적/개인적 탐욕들을 가려내는 견해 또한 중요한데 말이다.
주2: 가식이라고 표현하기도 어렵다. 왜냐하면 가식이란 것은 자신의 행위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면서 숨기고 진실된 행동인 척하는 것이다. 그러나 일수사견은 가식이 아니라 그렇게 보이기 때문에 그것이 진실된 행위라고 생각할수 밖에 없다. 의식이 그렇게 프로그램화 되어 있는데 어떻게 그를 탓할 것인가?
그러한 행동을 하는 가치 판단의 기준을 무슨 근거로 세워야만 하는 것일까? 모든 사람에게 이롭도록 하는 공동선의 견해가 과연 있는 것인가? 불교에서는 견해라는 것을 삿된 견해와 바른 견해로 나눈다. 그렇다면 무엇이 삿된 견해이고 무엇이 바른 견해인가?
그다음은 견해에 대한 실천의 문제이다. 견해에 의하여 행동하기 때문이다. 첫단추가 잘못 꿰어지면 어긋나게 되어있다. 다음 단계의 실천이 조화로 귀결될 것인지 분열로 귀결될 것인지는 그 행위에 따른 결과로 판단되어질 일이다. 세상을 보는 해석틀에 대한 실천도 그만큼 다양하기 때문이고 누군가에게는 그 실천행위가 폭력으로 비추어지기도 할 것이다. 그리고 아니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행위의 결과는 미래의 것이기 때문에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른다. 결국은 나몰라라 해야할 것인가?
모든 견해는 그것대로 다 의미가 있기 때문에 인정해주자는 다원주의도 자칫하면 병폐가 될수 있다. 분열 혹은 부조화를 조장할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공자 할아버지의 중용(中庸)주3이 중요한 미덕인 거 같다. 그러나 공자 할아버지만 이말씀을 하셨을까? 중용은 곧 조화로운 삶인데 이것은 세계 어느 곳에서나 시대를 불문하고 발견되는 미덕일 것이다.
주3: 희노애락이 발현되지 않은 상태를 중(中)이라 하고 발현되어 절도에 맞는 것을 화(和)라고 한다. 중(中)이라는 것은 천하의 큰 근본이고 화(和)라는 것은 천하의 달통한 도이다. 중(中)과 화(和)를 다하면 하늘과 땅이 자리잡고 만물이 자라나게 된다. 중용
공동선의 실천이란 것은 단순해야할 것이다. 생명을 함부로 죽이거나 괴롭히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이것이 가능할 것인가? 당장에 먹고 살기 위해서 고기를 먹고 농사를 지으면서 잡초, 풀벌레를 살생하지 않는가?
어찌 보면 우리 인간의 모든 실천 행위의 총체인 삶의 여정은 덜 폭력적인 방법으로 향하는 대상 놀음일 것이다. 종교, 정치, 철학이라는 생각 놀음(견해)을 다 떼고 뭐가 남아야할 것일까?
생각해볼 문제이다.
여기 물레방아라 불리우는 그 무엇인가가 있다. 물레방아를 보고 떠오르는 나의 심상心象, 마음의 모습은 무엇인가? 나는 돈키호테처럼 불의를 응징하는 기사도에 입각한 정의의 사도가 못된다.
본능에 충실한 수컷,
떡방아 찍는 것을 보면서 가루지기, 용녀, 변강쇠… 조선시대 포르노
나의 물레방아를 바라보는 심상은 아래 글을 통해 정당화된다. Dilthey아저씨 고마와요.
Dilthey는 이를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내성(內省)이 아니라 오직 역사를 통해서만 우리는 자기 자신을 알게 된다.” 자각의 주체는 일반적으로 그 자신의 자각을 내성하면서 자기 자신을 알고 이해하게 된다고 상상하지만, 새롭고 형성된 정신geist 과학(계보학에서 언어학까지)은 이것이 전혀 사실이 아니라는 점을 매우 분명히 밝혔다. 그들은 주관성이 자각 속에서 나타나는 거의 모든 것이 주관성으로는 보이지 않는 방대한 상호 주관적 그물망의 소산이라는 사실에 완전히 무지하기 때문이다. 부분적으로는 역사의 산물이기도 한 이 그물망은 Dilthey의 언급이 지적하였듯이, 주관성과 의식이 작동할 수 있게 하는 거대한 문화적 배경이다. 그리고 주관성은 내성으로 시간을 헛되이 보내며 스스로를 알고 있다고 상상하면서 여전히 이 형성적 그물망에 무지한 채로 지복 속에 머물러 있다. 이처럼 주관성은 정교한 거짓과 자기-기만의 그물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다. 켄 윌버의 통합영성
히히,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견해나 대상을 보고 즉각적으로 떠오르는 심상이라는 것은 오래도록 내려온 문화적 습성(해석의 그물망, 상호 주관적 그물망의 소산)이 무의식 속에서 자리 잡아서 나를 블랙홀처럼 끌어당겨 그렇게 떠오르게 만든다는 것이다.
땟치! 정교한 거짓과 자기-기만의 상호 주관적 그물망이라는 문화!
그니까 내책임이 아니다. 흐힛! 거기다가 나는 수컷 본성적 이데아를 충실히 따라갈 뿐이다. 내가 물레방아를 보고 음탕한 생각이 떠오르듯이 돈키호테의 심상도 아마 그러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결론 내리는 것이 정당할 것인가? 연암 박지원께서는 풍차를 설계하면서 이런 생각을하셨을까? 조선시대의 유학자셨으니 나랑은 달랐을 것이여. 그당시의 상호 주관적 그물망의 소산은 남녀칠세부동석이었지 아마?
이 또한 생각해 볼 문제다.
스페인 마드리드 남부에 위치한 라만차 지방은 마드리드 아토차 역에서 기차로 2시간 정도 소요된다고 한다. 우선 찜해둔다. 그런데 소설 속 상황이 세계적 관광 명소로 탈바꿈 되었다는 것은 그 나라에겐 축복일 것이다. 우리나라에도 그런 곳이 하나 있긴 하다. 그러나 세계적이진 않다.
재작년에 남원골에 갈 기회가 있었는데 좀 초라한 느낌이었지만 광한루는 인상적이었다. 여기에 가보면 연못의 잉어들이 볼만하다. 커도 이렇게 큰 잉어들이 때지어 있는 것은 머리털 나고 처음 보았다. 간혹 사람의 얼굴을 닮은 인면어도 눈에 띈다고 한다. 나는 보지 못했지만 토실 토실하게 건강한 잉어들을 보는 재미가 있다. 잉어의 수명이 80년 정도 되는 것도 있다고 한다.
이것 또한 인간이 잉어를 바라보고 투영된 심상心象
일수사견(一水四見)
근데 나는 이 잉어가 미녀와 야수의 야수로 보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