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굴은 구멍穴이다. 구멍은 비어있다. 비어있기 때문에 무언가 생겨날 잠재성1이 있는 것이다. 여성이 아름다운 것은 생명을 배태시킬 입구가 있기 때문이다. 동양에서 강조하는 없을 무無는 아무것도 없다는 의미가 아니다. 비어있는 공간은 우리가 오감으로 감지못할 뿐이지 무한한 가능성을 품고 있는 형태형성장morphic field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정신적이건 물질적이건 비어있을때 소통의 여지가 있는 것이지 채워져있다면 막혀서 소통이 불가능하다. 공명한다는 것은 비어있다는 전제가 있어야 가능하기 때문이다. 고대 수행자들은 이것을 직관적으로 알았고 체험했기 때문에 자발적 가난함을 실천했던 것이다. 그러나 비어있기 때문에 항상 채워지고자하는 내적 혹은 외적 동인動因으로 인하여 금새 막혀버리는 가능성도 존재한다. 아니 오히려 더 쉽게 막힐수 있다. 청소를 안하면 계속 지저분해지는 것과같다. 깨끗할수록 때타기 쉬운 법이다. 그래서 그게 엄청난 병이 될수 있다. 그것을 극복하는 것도 수행이다. 수행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그에 상응하는 번뇌마煩惱魔도 더욱 강해진다고 한다.
주1 구멍 혈穴의 아래의 숫자 八(8)은 발생을 상징한다. 3과 8은 역학에서 동방木에 비유하는데 생성, 창조, 발생의 의미를 갖는다.
몬세라트 산에서 내려온 이냐시오 성인은 수도원에서 15㎞ 떨어진 만레사 마을 인근 동굴 안에서 1년간 영신수련을 했다. 이 시기 그는 관상과 내적 쇄신을 통해 은총의 지배를 받는 속량된 몸으로 그리스도의 새로운 인간(로마 6장 참조)으로 태어났다. 하지만 그의 영신수련은 결코 순탄치 않았다. 회심의 순간을 단 한시라도 잊지 않기 위해 몬세라트 산봉우리가 바라다보이는 동굴에서 그는 연일 단식과 고행을 하며, 때때로 나무를 깎은 탁발 그릇을 들고 문전걸식으로 생명의 끈을 유지한 채 추위를 견디며 어둡고 습한 동굴 안에서 하느님과의 만남에 전념했다. 한때는 어두운 밤에 갇힌 자신의 영에서 벗어나지 못해 자살을 생각할 만큼 우울증에 빠지기도 했다. 그래서 그의 영신수련에는 기도방법뿐 아니라 삶의 태도를 근본적으로 바꾸려는 지력과 의지의 수련법도 어우러져 있다. [스페인 가톨릭 문화와 역사 탐방] (4-끝)로욜라·몬세라트·만레사
폐관閉關이란 수행용어가 있다. 그대로 직역하면 문을 닫아걸어 잠근다는 뜻인데 수도자들은 일정기간 동안 외부와의 소통을 단절하고 수행에만 열중한다. 그 이유는 감각의 문이라는 오관눈/코/입/귀/몸의 감각, 五官을 독하게 차단하는 것이다. 짧게는 100일 길게는 1,000일 수행2을 한다. 그러나 생명체의 본성은 활동성에 있기때문에 가두면 가둘수록 이것이 안에서 쌓이다가 급기야 반대로 방향을 틀어 뻗어나가는 압력이 증가하기 마련이다. 압력밥솥을 상상해보자. 강하게 막을수 있는 정신적/신체적 여력이 충분하지 않으면 폐관수행이 실패한다. 더큰 문제는 정신적/신체적 질병이 발생하는 것이다.
주2 전통 수도 신체학에서는 대개 30일 주기로 3번을 사이클로 가정할 때 신체나 정신의 1주기가 완성된다고 한다. 선방에서 100일 수행을 하는 이유가 인체를 이루는 지수화풍 사대의 생성과 소멸의 주기가 3개월(대략 100일)을 기준으로 마디를 이루고 3년(1,000일)을 기준으로 대순환이 되기 때문에 수행을 발심하여 이 기간동안 용맹정진을 한다면 공덕변화의 마디를 생성시킨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것을 생명에너지라고 해두자. 그것은 강력한 욕구가 될 수도 있고 분노가 될 수도 있다. 욕구나 분노의 힘은 엄청난 힘을 발휘한다. 일상생활의 에너지보다 분노와 탐욕의 몰입 강도가 훨신 크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러한 에너지들은 어디론가 빠져나가거나 길들여져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그 강력한 활동성의 욕구 에너지가 폭발되어 정신적 혹은 신체적 장애로 발현될 위험이 항상 도사리고 있다. 그렇기때문에 티베트에서는 폐관수련이 가능한 수도자를 스승이 엄밀하게 심사하여 결정한다고 한다.
그러나 세상과의 소통이 단절되면 그만큼 내적 자기성찰의 시간도 따라서 풍부해진다. 그 강력한 욕구에너지를 정신의 에너지로 쌓고 길들여 긍정적으로 순화시키는 것이 바로 폐관수행의 요체이다. 따라서 이 수행은 양날의 칼처럼 순기능과 역기능이 항상 공존하는 것이다. 겉으로 본다면 수행자와 죄수는 그들이 거주하는 장소와 형식면에서 자발성의 있고 없음의 차이뿐이다. 그러나 그 자발적 수행도 폐관이 극에 달하여 자신의 정신/생명 에너지가 쌓아지는 과정에서 제대로 갈무리되지 못한다면 울체가 되어 죄수의 행동처럼 변질되어 버린다.
쿤달리니 수행증후군이 비슷한 예이다. 다양한 종류의 수행 전통들이 있지만 갈무리된 에너지들이 타자와의 적절한 소통으로 순화되지 않는 자발적 고립을 선택한 만큼 정신적 혹은 육체적 어려움을 크게 발생시킬 수 있다. 쉽지않은 길을 선택한 만큼 위험성도 비례하여 잠재한다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동굴 수행자들 중에 정신병자나 사회적 관계에서 악영향을 미치는 사람들이 많다.
내눈을 바라봐
본질적인 질문이 있다. 수행자들이 왜?
깨달음을 추구하는 것인가?
어느 스님에게서 들은 법문이 있다. 깨달음을 열반, 기독교적 용어로 천국이라고 표현할 수 있겠는데 쉽게 설명하자면 번뇌의 소멸기독교적 용어로 하느님과 항상 함께함이다. 거기?는 탐욕, 분노, 어리석음이 없는 정신적인 안식처이다. 번뇌의 잠재성도 없는 경지이다. 그런데 그렇게 번뇌를 완전히 소멸시킨다는 것이 왜? 필요한가?
모든 사람에게 이익이 되게함이다. 즉, 깨닫기위해서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이익이 되기위해서 수행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모든 사람의 번뇌 소멸(해탈)로 인도하기 위해 수행을 하는 것이라고 한다. 나만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을 천국으로 가게하기 위해서 수행을 한다는 것이다. 수행의 최종목적은 홀로서기가 아니라 함께서기이다. 모든 사람에게만 국한되어서도 안된다. 생명, 나를 둘러싼 우주까지도 여기에 포섭된다.
그래서 대승(大乘)
즉, 크나큰 수례라는 것이다. 해탈 혹은 천국으로 인도하는 짐꾼,
그런데 그러기 위해서 폐관수행처럼 자발적 고립을 선택한다는 역설이 있다.
원효대사가 창건한 자재암은 원효대사가 요석공주의 세속의 인연을 맺은 뒤 이곳에 초막을 짓고 수행하고 있을 때, 관세음보살이 변신한 아름다운 여인이 유혹을 하였다. 설법으로 유혹을 물리친 원효대사는 이내 그 여인이 관세음보살이었음을 깨닫고 더욱 수행에 정진하는 한편, 관세음보살을 친견하고 자재무애의 수행을 쌓았다는 뜻에서 절을 짓고 이름을 자재암이라 했다고 한다. Naver 블로그에서
원효 스님께서도 동굴수행 과정에서 여러가지 환영을 경험하셨을 것이다. 소요산의 자재암에 재작년에 가보았다. 거기서 돌아가신 어머님을 생각하면서 절을 하였다. 이번에는 스페인 만레사 이냐시오 성인의 수행터에서 어머님을 위해 당신의 손때가 묻은 기도서와 묵주를 가지고 기도를 해야겠다.